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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Jan 12. 2023

#15 끝내 누르고 싶지 않았던 그 번호


<소설> 주인공 - 소연



대학시절, 교수님은 유난히 소연을 아꼈다. 광고홍보학과에 재학했던 소연은 수강하는 모든 과목마다 A+를 받았다. 전공이 아닌 교양과목까지 모두 다 말이다. 게다가 해마다 방학이 되면 해외 봉사를 다녔으며, 토익도 늘 900점대를 유지했다. 더군다나 친절하기까지 했다. 예의도 바르고, 늘 단정한 옷차림을 고수해 150명의 동기들 중 교수님의 애정과 관심을 독점하고 있기로 유명했다. 덕분에 과에서 진행되는 모든 행사에 가장 최우선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비록 학부생 신분이었지만 담당 교수가 진행하는 연구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동훈을 만나고 달라졌다. 소연은 그녀가 누렸던 모든 특권을 서서히 잃어갔다. 소연이 대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친한 선배의 소개로 동훈을 만났다. 그는 꽤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배우 유연석을 닮은 준수한 얼굴에 키도 훤칠했다. 옷을 고르는 감각도 훌륭했다. 또, 그는 과감하기까지 했다. 캠퍼스 내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BMW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다. 실로 어마어마한 가격의 오토바이였는데, 그는 대학생 신분인데다가 따로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으니 아마 부모님이 선물로 사준듯 했다.


돈도 외모도 모두 갖춘 데다가 매너까지 훌륭했던 동훈에게 소연은 속절없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동훈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공부도 명예도 아니, 미래까지도 모두 포기할 수 있었다. 모두가 탐하는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열에 사로잡혀 소연은 끈질기게 동훈에게 매달렸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부터 '연인 선언'을 받아낼 수 있었다. 


동훈은 '만남'에 집착했다. 시종 일관 함께 있어야 했다. 연인이 된 이상 잠시도 떨어지면 안 된다고 귀가 따갑도록 강조했다. 학과가 달랐지만 소연은 거의 모든 수업을 동훈과 함께 들었고, 강의가 끝난 후에는 동기들과 함께하는 스터디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교수의 주도로 결성된 스터디 그룹은 2시간 정도의 모임이 끝나면 꼭 커피와 디저트를 사서 교수 강의실에 들러 그에게 인사를 전하고 일종의 훈화 말씀을 귀에 담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그룹에서 소연이 빠지자 교수는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그룹의 리더를 불러 소연이 지속적으로 빠지는 이유가 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자, 리더는 그녀가 본 최근의 소연의 모습을 실토했다. 


"교수님, 소연이가 사회복지학과 10학번 김동훈이라는 친구를 만나는데, 

완전히 빠져서 공부도 내팽겨지고 스펙 쌓기도 포기한 것 같더라고요. 

오로지 그 남자랑 연애하는 데만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요."


리더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수는 곧바로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동훈과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서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고 있던 소연은 핸드폰 진동이 울려 가방이 움직이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교수는 소연에게만 주어지던 모든 특권을 회수했다. 학과 앞 복도에서 교수를 발견한 소연이 90도로 인사를 건네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싸늘함만을 남긴 채 자리를 떴다.

소연은 달라진 교수의 태도를 발견할 여력도 없었다. 동훈을 만나기도 바쁜 시간이었으니까. 얼마 뒤, 친한 선배로부터 교수가 왜 자신에게 냉랭하게 구는지에 대해 듣게 됐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때의 소연에게 중요한건 오직 동훈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소연은 1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동훈을 만났다. 주말에는 아예 동훈의 자취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소연도 역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부모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이유도 없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동훈과의 반 동거 생활을 즐겼다.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모두 함께. 모든 순간이 사랑하는 동훈과 함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훈이 주말에는 서로 각자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하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처음에는 그런 소리가 어디있냐며, 자신은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고 한사코 거절했던 소연이었다. 하지만 거듭된 제의에 우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그주 주말은 집에서 멍하게 TV를 보며 시간을 죽였다. 일요일 늦은 밤, 잠을 깨우는 강한 허기에 소연은 자취방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얼마나 소연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지를 말해주듯 일주일 전 동훈이 건네준 생수병만 나뒹굴고 있었다. 결국 소연은 잠옷 바지에 패딩 하나를 걸친 뒤, 집을 나섰다.

집과 가까운 편의점을 두고, 일부러 동훈의 자취방 근처에 있는 마트까지 걸어갔다. 과자를 사서, 동훈에게도 가져다 줄 요량이었다. 그 핑계로 얼굴도 슬쩍 보고 말이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들어간 마트에서 동훈이 좋아라 하는 나쵸를 몇 봉지 담고 맥주를 고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1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왔던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은...그렇다. 동훈이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위로 높이 들어 동훈에게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여자였다. 교양 과목인 영어 스피킹 강의에서 늘 뒷자리에 앉아 딴청을 부리던 여학생이었다. 강의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는데도, 교재조차 구입하지 않아 늘 담당 교수의 따가운 눈총을 받던 사람이라 금세 이름까지 떠올랐다. 


그랬던 그녀가 한 겨울, 자칫하면 속옷까지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고 동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당장 달려가서 두 사람의 손을 떼어놓고 싶었지만, 급하게 나온터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무릎이 다 늘어난 잠옷 바지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패딩 차림. 이렇게 허접한 차림으로 배신의 현장을 덮칠 수는 없었다. 


결국 소연은 그들의 맥주를 사러 마트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담았던 물건을 내려놓고 집을 향해 달렸다. 심하게 떨리는 손을 간신히 움직여 문을 열고, 온 집안을 헤집어 예전에 그녀의 엄마가 백화점에서 거금을 주고 사주었던 원피스를 찾아입었다. 자신보다 더 어리고, 하얗고, 예쁜 그녀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화장대 위의 케이스를 열어 샤넬 귀걸이까지 착용하고 평소에는 쳐다도 보지 않던 하이힐까지 신고 동훈의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소연의 집에서 동훈의 자취방까지는 그녀의 보폭으로 딱 15분이 걸렸다. 그 짧은 거리를, 소연은 무려 한 시간에 걸려 도착했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실, 그가 바람을 피운 것이 괘씸하다기보다 오히려 혹시나 동훈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라는 무서움이 컸기 때문. 


소연은 생각했다. 동훈같은 남자는 살아 생전에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고.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니, 그저 다른 여자와 잠시 놀아난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미안하다는 딱 그 한마디만 내뱉으면 너그러이 받아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만약에 동훈이 순순히 관계를 인정하고, 헤어짐을 고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깊어지는 고민에 발걸음은 무거워졌고, 집을 떠난지 한 시간이 되어서야 동훈의 자취방 앞에 설 수 있었다. 


소연은 도어록에 비밀 번호를 눌렀다. 떨리는 손으로 '0321'을 입력했다. 두 사람이 만난 날짜를 떨리는 손으로 꾹꾹 누르니,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알림이 들리자 안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분명 당당히 따져물으려 했건만 눈앞에 펼쳐친 난잡한 옷가지들에 소연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동훈은 나체로 바닥에 누워있었다. 침을 줄줄 흘리면서,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말이다. 그의 옆에 놓인 검은 비닐 봉지에는 병원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었던 주사기 다발이 가득했다. 집에서는 당장이라도 구토를 부를 만큼 지독한 냄새가 풍겼고, 아까 동훈의 손을 잡고 있었던 여자도 간신히 속옷만 입었을 뿐 사실상 다 벗은 것과 다름 없는 상태로 비명을 지르며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선 소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뉴스에서만 보던 광란의 마약 파티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난잡한 행위의 흔적인 것일까. 머리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과 가정이 스쳐갔지만 소연이 할 수 있는 건 차가운 현관 바닥에 주저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동훈은 여전히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계속해서 반쯤 감긴 눈으로 헛소리를 지껄였고,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웃어댔다. 때로는 야릇한 신음 소리를 내기도 했다. 반면 여자는 황급히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곤 소연에게 자신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애원했다. 소연이 무력하게 길을 터주자, 그녀는 맨발로 자취방을 벗어나 소연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봤던 어떤 조폭 두목이 마약에 찌든 부하를 깨우기 위해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던 소연.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얼음을 꺼내 동훈이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던 커다란 통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싱크대에서 찬물을 받아 동훈의 희고 고운 나체를 향해 들이부었다. 


"아 씨x! 이게 뭐야?"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쌍욕을 내뱉으며 동훈이 눈을 떴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온몸에 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 것인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이내 소연을 똑바로 쳐다봤다. 


"엥? 김소연?...어? 니가 왜?"


짜증과 놀라움 그 경계에서 동훈은 헤매고 있는 듯했다. 소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하고 싶어도 도무지 자의지로 입술을 벌릴 수가 없었다. 대신 1년 동안 샤워를 할 때조차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던 반지를 벗어 그의 벗은 몸 위로 던졌다. 기묘하게도 소연이 던진 반지는 정확히 동훈의 배꼽에 안착했다.


동훈은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행거의 봉을 붙잡고 절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 소연은 그가 사주었던 프라다 사피아노 핸드백으로 동훈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이마가 살짝 찢어진듯,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동훈이 고통에 신음하자, 소연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눌렀다.

모두가 아는, 부디 살면서 누를 일 없길 바라는 그 번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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