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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Oct 06. 2021

악성 곱슬로 산다는 괴로움

머리를 말리지 않고 그대로 출근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지독한 악성 곱슬 머리의 소유자라는 것을.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뒤, 거울을 보면 한 마리 늠름한 사자가 서 있다.  늘 보는 모습이라 익숙할 때도 됐지만 사실 여전히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사자 갈퀴처럼 얽혀있고 폭탄이라도 맞은 듯이 부스스한 이 머리를 언제 다 일일이 고데기로 펴지?'라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져 온다. 심지어 바쁜 출근 시간에는 내게 주어진 단 15분 안에 일일이 머리를 다 펴야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비가 오는 날은 습기 때문에 머리가 잘 펴지지도 않는다. 230도가 넘는 고열로 달궈진 고데기를 붙잡고 악곱슬과 한바탕 사투를 벌여야 겨우 출근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아니, 그럼 미용실에 가서 매직을 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설마 매직을 안 해봤겠는가. 3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각의 매직도 해봤다. 그런데 이 놈의 머리는 다 소용이 없더라. 매직을 해도 2주만 지나면 뿌리부터 곱슬기가 올라오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2주 만에 30만 원이 넘는 돈이 증발해 버리는 꼴이니 돈도 아깝고 짜증도 나서 어느 순간부터 매년 장마철에 들어가는 시기, 딱 한 번만 매직을 하게 됐다. 


그 외에는 모두 고데기로 내가 일일이 머리를 직접 펴고 있다. 잦은 고데기 사용으로 머리는 이미 상할 대로 상해버렸다. 나도 비단결처럼 고운 머릿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보면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하지만 고데기 사용을 중단할 수는 없다. 집게핀으로 섹션을 나누어 있는 힘껏 머리를 펴지 않으면 곱슬기로 인해 머리가 자꾸 부풀어 올라 출근을 할 수가 없다. 

한동안 머리를 묶어 다녀보기도 했다. 근데 머리를 묶어 다니더라도 고데기로 머리를 어느 정도는 펴야만 한다. 워낙 악성 곱슬이기 때문에, 머리를 바로 말린 상태에서는 머리가 묶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출근 준비 시간이 2배로 걸린다. 


아침에 두 눈을 비비고 일어나 곧장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한다. 그런 다음 드라이기로 머리를 아주 바짝 말려야 한다. (조금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말리지 않으면 고데기를 할 때 애로사항이 많다. 일단 머리가 타버리고, 습기 때문에 열이 고데기가 먹히지도 않는다.) 머리를 말리고 화장실로 들어가 집게로 각 부분별 섹션을 나누어 곱슬기를 제거한다. 이 때 힘 조절을 잘해야 한다. 안 그러면 머리가 후두둑 끊어지기에.

온힘을 다한 고데기 작업이 끝나면 이미 손상되었지만 혹시나 하는 바람에 에센스를 듬뿍 발라준다. 그럼 그제서야 출근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는 날이 있다. 비가 오는 날이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오는 날에는 애써 펴놓은 곱슬 머리가 습기를 머금게 되어 다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정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존재감을 과시한다. 

회사가 아니라면 모자라도 쓰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급적 출근길에 택시를 타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는 날에는 가방 속에 휴대용 고데기를 챙겨 넣는다. 물론 휴대용 고데기로는 어림도 없는 최악의 곱슬머리이지만 그거라도 챙겨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니까.

작은 소망이 있다. 이미 남들은 다 하고 있지만, 나만 못하는 그런 일. 머리를 감고 다 말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일. 드라이기를 사용하지 않고 수건으로 물기만 가볍게 닦아내고 외출하는 일. 정말이지 악성 곱슬인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언젠간 알약 하나만 먹으면 곱슬이 모두 사라지는 마법 같은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샤워 후, 머리를 말리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보고 싶다. 

오늘 아침에도 서울은 비가 왔다. 20분을 공들여 머리를 폈지만, 출근길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이미 곱슬 머리가 다시 고개를 들며 나를 비웃었다. 애써 손으로 머리를 누르며 출근하여 화장실로 달려가 머리를 매만졌다. 역시나 별 효과가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했다. 점심 때, 그간 다이어트 때문에 멀리하던 엽기떡볶이를 먹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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