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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Feb 06. 2023

#16-1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 주인공 : 유안


뙤약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날이었다. 귓가를 울리는 매미 소리가 잦아들 무렵, 유안의 자리에 놓인 오래된 전화기에서 요란한 벨 소리가 울렸다. 


"김유안 씨, 지금 당장 내 방으로 들어오세요."


총괄 본부장의 호출이었다. 입사한 지 고작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유안을 총괄 본부장이 직접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사수, 박 대리. 그의 얼굴은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너무 놀라 눈만 끔뻑이고 있는 사수를 뒤로 하고, 유안은 볼펜 대신 사용하는 만년필과 메모 패드를 들고 본부장 방 앞에 섰다.

문 손잡이를 잡는데, 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본부장의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유안의 심장이 갑자기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고장난 것처럼. 애써 마른침을 삼키고, 마스크를 코까지 끌어올린 후, 문을 열었다.


유안이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정수리로 무엇인가 날아들었다. 둔탁한 무엇인가가 머리에 닿자마자 유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뜨거운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느낌에 유안은 반사적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그녀의 손에 묻어나온 건 검붉은 액체였다. 기분 나쁜 점성을 동반한, 병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바로 그 액체. 당황한 채로 두리번거리며 휴지를 찾는 유안의 눈 앞에는 아연실색한 표정의 본부장이 자신의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누가 보면 꼭 심장이 멈춘 사람처럼.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흘러내리는 피를 휴지로 간신히 닦으며, 유안은 상황 파악에 나섰다. 눈앞에는 스타벅스 벤티 사이즈는 될 법한 대용량 텀블러가 뚜껑이 열린 채 나뒹굴고 있었다. 커피가 조금 남아있었던 것일까. 바닥에는 연갈색 커피와 유안의 피가 뒤섞인 오묘한 액체가 고여있었다. 유안이 상황 파악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본부장은 너절한 바닥을 피해 뛰다시피 걸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유안의 사수, 박 대리를 호출했다. 그답지 않게 아주 떨리는 목소리로. 


"박 대리, 여기 상황 좀 수습해 줘요." 


이 한 마디를 휙 던지고, 그는 잿빛 양복 재킷과 삼지창 모양이 선명하게 그려진 자동차 키를 챙겨 회사를 벗어났다. 아주 빠른 발걸음으로 말이다. 


유안의 직속 상사, 박 대리는 바닥에 주저 앉아 이마에서 솟아나는 피를 보고 일이 단단히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는 서둘러 탕비실로 달려가 상부장에서 구급 상자를 꺼내 돌아왔다. 다급한 손놀림으로 과산화수소를 꺼내 탈지면에 묻혀 소독을 시작했다.

박 대리의 손놀림에 따라 유안은 움찔했다. 탈지면이 상처 부위에 닿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 오히려 본부장이 집어던진 텀블러에 맞은 것보다 소독이 더 괴로웠다. 유안은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걸, 간신히 참았다. 만난 지 겨우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사수에게 더 흉측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으니까. 그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 대리의 응급 조치에도 피는 쉬이 멎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른 직원들을 불러 유안의 옷과 소지품을 챙기게 한 뒤, 곧장 인근의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병원은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웠고, 환자도 없어 곧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유안이 상처 부위를 지혈한 채로,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 박 대리는 분주히 대기실 밖을 오고 가며 자신의 상사인 팀장과 통화를 했다.


평일 한낮 시간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한 병원 대기실에서 유안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도대체 본부장님은 왜······'


박대리가 돌아오자 유안은 아까의 사고 이후, 곧장 닫고 있던 입을 겨우 열어 물었다. 본부장님이 자신에게 텀블러를 있는 힘껏 던진 이유가 무엇이냐고. 내가 무얼 크게 잘못한 것이냐고. 아무리 잘못한 게 있더라도, 그래도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냐고. 


낮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져 묻는 유안에게 박 대리는 도저히 진실을 말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입사 때부터 그녀를 사수로 배정되어 함께 일을 해 온 자신의 입에서 나와야 할 답변은 도무지 자신도 납득되지 않을 만큼 기괴했으니까. 하지만 거듭 답을 구하는 유안의 눈빛에 박 대리는 끝내 진신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총괄 본부장인 재현은 입사 첫날, 자신의 방으로 박 대리와 함께 인사하러 온 유안을 보고 묘한 설렘을 느꼈다. 아내와 이혼 후, 5년 동안 홀로 지내며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던 차였다. 주변에서 자리를 만들어 주어 여러 여자들을 만나봤으나, 다들 재현의 재력 외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연봉은 얼마고, 집은 자가인지 전세인지, 차는 무얼 타고 다니는지, 전처와의 사이에 자식은 있는지 없는지 따위를 물어보기 바빴다.

그들의 속물근성에 넌덜머리가 난 재현은 더 이상 맞선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날아드는 연락을 모두 피하자, 더는 재현에게 중매를 해 주겠다는 이들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저 취미로 골프를 치고, 낚시나 다니며 살 요량이었지만, 인간은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점점 재현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찾게 됐다. 그러다 만난 것이 바로 유안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유안을 보자마자, 재현은 마음에 쏙 들었다. 사원급 면접은 참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유안의 채용 현장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퍽 후회될 정도로. 특히 유안의 크고 맑은 눈에 자꾸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적갈색의 긴 머리칼까지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신입 사원인 유안이 의례적인 첫 인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을 나갈 때까지도 재현은 유안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재현은 곧장 박 대리를 불러 유안의 이력서를 가져오게 했다. 박 대리가 서류를 건네기도 전에 먼저 낚아채어 유안의 나이를 확인했다. 서른 살. 자신과 딱 10살 터울이었다. 첫 만남 때의 얼굴로 홀로 추측했던 나이보다는 실제 나이가 더 많았다. 많이 봐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라 걱정이 컸는데 내심 서른 살이면 마흔 살인 자기와 어울려도 크게 이질감이 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재현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유안의 핸드폰 번호를 자신의 핸드폰에 입력하고, 그녀의 이력서를 책상 서랍 가장 윗칸에 고이 넣었다.




유안은 입사 다음 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상한 문자를 받았다. 


"김유안 씨, 나랑 진지하게 만나볼래요?"


한창 전임자의 업무를 인계받느라 정신 없었던 유안은 광고 혹은 장난 문자 정도로 여기고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다음 저녁에는 카톡이 날아들었다. 


"김유안 씨, 나 박재현입니다. S기획 총괄 본부장이요. 문자 확인 못했나요?"


그제야 어렴풋이 어제의 문자가 불현듯 스친 유안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도대체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한참 동안 고뇌하다가 유현은 이렇게 답했다.


"본부장님, 어제 미처 문자를 확인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를 좋게 봐주시고, 제안해 주신 것은 감사하나 저는 아직 누군가와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분간은 회사일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날 밤, 유안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튿날, 구내 식당에서 재현을 마주쳤지만 그는 유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심 그를 대면하면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걱정이 컸던 유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뒤, 사수인 박 대리로부터 재현이 독일 본사로 2달간의 출장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당분간 만날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유안은 마음 놓고 회사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4차 면접까지 치르고, 3개월의 연수 과정을 거쳐 어렵게 들어온 글로벌 기업인 만큼, 얼른 자리를 잡아서 빨리 성과를 내고 싶었다. 그에 따른 인센도 욕심이 나기도 했고. 

 

그렇게 한동안 일에 파묻혀 지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잡지 않고, 자발적인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수인 박 대리도 점점 그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입사 동기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과에 그는 야근을 하는 유안을 위해 저녁 도시락까지 사다 주며 내심 그녀를 응원했다. 


입사 3개월이 되어 수습이 종료되고 정직원으로 자동 전환이 될 무렵이었다. 유안은 총괄 본부장이 출장을 끝내고 복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잊고 있었던 그 문자와 카톡이 생각났다. 그가 다시 돌아오면 어떻게 마주해야될 지 암담했다. 그러나 일단 한 번 부딪혀 보기로 했다. 




재현의 복귀일 아침이 되자, 직원들을 분주해졌다. 각 부서 팀장들은 3단 레터링 케이크를 회의실 테이블에 세팅했고, 과장급 직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주문한 꽃을 화병에 정성스럽게 꽂아놓기 바빴다. 막내인 유안은 다과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전날, 미리 준비해 둔 화과자를 접시에 플레이팅하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본부장이 회사에 도착했다는 박 대리의 연락을 받았다. 황급히 회의실을 나오니 정말, 재현이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유안은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재현의 복귀를 환영하는 행사는 1시간 가량 이어졌다. 재현은 직원들이 건넨 꽃다발을 안고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고는 직원들 개개인에게 선물을 건넸다. 그가 직원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다름 아닌 만년필이었다. 다들 만년필을 잘 써본 적도 없지만, 일단 최종 보스인 본부장이 주는 것이니 호들갑을 떨며 넙죽 받기 바빴다. 선물을 건네는 재현에게 유안은 다시 한번 90도로 인사하며 감사를 전했다. 재현은 그녀의 감사 인사에 따로 답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유안은 동료들과 함께 어질러진 회의실을 말끔히 치우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오니 직원들이 재현이 건넨 선물을 하나씩 풀어보고 있었다. 직원들의 선물은 모두 동일했다. 독일제 펠리칸 만년필이었다. 그들은 처음 써보는 만년필에 당장 사용법을 유튜브에 검색해 봐야겠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모두 동일한 제품이었기에 유안 역시 자리에 앉아 기대 없이 포장을 뜯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유안은 포장지를 벗겨내고 케이스를 확인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본부장인 재현이 유안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몽블랑 제품이었다. 만년필 중에 가장 고가라는 바로 그 제품. 유안이 오래도록 열망했던 바로 그 만년필이었던 것이다. 유안은 홀린듯 케이스를 열었다. 순간, 유안은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만년필의 뚜껑, 그러니까 '캡' 부분에 유안과 재현의 이름이 함께 새져겨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유안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뇌에 빠졌다.

'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걸 받아도 되는 것인가······'


장고 끝에 유안은 본부장인 재현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직접 마주해서 말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으나, 보는 눈이 많아 카톡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유안은 미친 척하고 당돌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왜 자신에게 이렇게 고가의 만년필을, 그것도 캡에 당신의 이니셜까지 새겨 선물했는지를. 


한참 동안 카톡의 1이 지워지지 않았다. 유안은 퇴근도 하지 않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 1시간쯤 흘렀을까, 재현이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본 유안은 무례를 무릅쓰고 그에게 다가갔다. 재현은 막 유안의 카톡을 확인한 듯했다. 이윽고 재현은 유안에게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좋아하니까, 선물했죠. 뭐 다른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의 확고한 답에 유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재현은 무릎을 굽혀 유안과 눈높이를 맞추며 다시 말했다. 


"출장지에서도 계속 유안 씨 얼굴만 아른거리더라고요. 유안 씨가 거절했을 때, 속이 쓰렸지만 계속 당신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되돌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 마음을, 내 진심을 당신이 좋아할 것 같은 만년필에 담아 전했습니다. 또 거절당할까 봐 두려우면서도요." 


재현의 절절한 고백을 들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안이 입을 떼지 못하자, 그는 황급히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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