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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Apr 26. 2023

언젠가는 이루리 이루리라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깊은 어둠에 잠식당한 새벽. 마른 세수를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찬 기운이 감도는 몸을 덥힌다. 포근함과 안락함을 누리게 해준 이불을 고이 접어두고, 베개는 손으로 먼지를 깔끔하게 털어 제자리에 둔다. 그런 다음, 적당히 미지근한 물로 하룻밤 사이에 얼굴에 자리 잡은 먼지들의 흔적을 닦아낸다. 느린 발걸음으로 옷장으로 건너가 격자무늬가 인상적인 셔츠를 꺼내 입는다. 내친김에 바로 옆에 걸린 바지까지 입고, 배낭을 꾸린다. 언제나 꼭 필요한 물부터, 속옷, 여벌의 옷, 수건, 약간의 현금 그리고 지갑까지. 


야무지게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터덜터덜 걸어가 새벽녘 버스 첫 차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역에 도착한다. 목적지는 따로 정하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역무원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가장 먼 역이 어디인가요?"


잠시 흠칫 놀란 역무원은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내게 목적지를 전해준다. 들뜬 마음으로 지갑을 열어 카드를 건넨다. 잠깐의 기계음이 들린 이후, 내 손에는 티켓이 쥐여진다. 기차에 오르기 전, 가방을 열어 물과 다이어리 그리고 만년필을 꺼낸다. 이른 새벽이지만, 꽤나 북적이는 인파들을 뚫고 자리를 잡는다. 


기차가 출발하면 다이어리를 펼친다. 어젯밤 잉크를 가득 채워온 만년필로 새벽 어스름의 풍경을 그려낸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종이에 잉크가 젖어들어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을 바라본다. 몰려오는 피로에 잠시 눈을 감는다. 기차의 엔진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온다. 그렇게 잠시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든다. 


어딘지 모르게 부산한 소음이 들려올 때, 감았던 눈을 뜬다. 조용히 기지개를 켜고, 간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짐들을 챙긴다. 마지막으로 종착역을 알리는 승무원의 음성이 들리면, 자유로이 풀어두었던 배낭을 메고 사람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이른 시간대라 한산한 역 대합실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아본다.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아, 망설이다가 역무원에게로 다가간다. 배낭을 들쳐매고 있는 여행자의 물음에 그는 웃으며 역 앞의 허름한 식당을 가리킨다. 족히 50년은 되어 보이는 듯한 작은 가게의 이름은 '역전식당'. 대한민국의 모든 역 앞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이 식당의 메인 요리는 순댓국이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검붉은 앞치마를 입고, 투박하게 썰어둔 순대를 담고, 뽀얗게 우러난 육수를 담는 주인장. 그녀가 내어준 순대국밥 한 그릇에 피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이제 길을 나설 차례. 핸드폰 대신 이정표에 의존하며 걷고 또 걷는다.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걸어 눈에 띈 카페에 들어가, 잠시 발의 피로를 달랜다. 재즈 음악이 흘러 나오는 카페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다는 아인슈페너 한 잔을 주문한다. 부드러운 거품을 입에 물고, 잠시 창밖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이상할 만큼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한 곳, 영원토록 잊지 않도록 그 눈부신 풍경을 눈에 담고 또 담는다. 그걸로는 조금 부족한듯하여 나는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내려놓고, 만개한 꽃밭 옆으로 가 눕는다. 옆에서는 꽃내음이, 위로는 하늘의 풍경이 나를 덮친다. 그렇게 나는 잠시 단잠에 빠져든다. 아무 근심, 걱정도 없는 아이처럼 해사한 얼굴로. 


-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은, 아니 이룰 어느 날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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