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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Jun 16. 2023

오늘의 내가, 행복하니까.

한낮의 태양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현관 문을 열고 신발을 벗자마자 몰려오는 습한 기운에 곧장 창문으로 달려갔다. 맑은 공기가 집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활짝 열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한 데 모아 빨래를 돌렸다. 요란하게 요동치는 세탁기 옆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이불들을 주워 가지런히 정리했다. 정글 같았던 곳이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아졌을 때, 나는 벌러덩 드러누워 책을 펼쳤다. 


매트리스 옆에는 책이 쌓여있다. 읽고 싶은 책과, 읽다가 멈춘 책, 다 읽었는데 또 읽고 싶은 책. 세 가지 부류로 구분되는 책들이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위태롭게 켜켜이 쌓여있다. 그중 한 권을 꺼내 드러누운 것이다. 제법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일렁이는 머리칼을 집게 핀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책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읽고 싶었던 책이었으니 단숨에 술술 읽힌다. 시간의 흐름 따위 중요하지 않다. 읽는 내가, 몰입하는 내가 중요하다.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니 슬슬 어깨가 저리고, 팔이 아파진다. 발밑에 굴러다니는 베개 하나를 주워 등 뒤에 대고 앉는다. 그리고 또 다른 베개를 무릎에 대고 그 위에 책을 얹는다. 엔딩을 향해 가는 책, 아쉬워서 자꾸만 앞으로 되돌아가지만 또 다시 끝을 보이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 가까워지는 것이 싫어 중간에 덮고 다 읽었는데 또 읽고 싶은 책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그 책의 탑 속에서. 


다 읽었는데 또 읽고 싶은 책에는 각양각색의 형광펜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노란색부터, 연두색, 하늘색까지. 책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지만 괜찮다. 어떠 색이든 그것은 모두 내가 좋아하고, 담아두고 싶은 구절이니까. 나의 흔적들을, 나의 소망들을, 나의 희망들을, 나의 슬픔과 기쁨의 산물인 문장들을 다시 한번 눈과 마음에 담는다. 그리고 단단히 잠근다. 영원히 내게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렇게 온전히 하루를 보내고 나면 참 이상하게도 모난 마음들이 사그라든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용기마저 생긴다. 내일이면 다시 사라질 용기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늘의 내가, 행복하니까. 오늘의 내가, 즐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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