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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Nov 15. 2021

언제 봐도 좋은 큰누나가 되려면.

저는 10살 차이 늦둥이 남동생이 있습니다.

내겐 10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남동생이 있다. 아직도 12년 전의 일이 생생하다. 어두운 새벽, 엄마는 갑작스럽게 극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놀란 아빠는 황급히 엄마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힘이 다 빠진 상황이었지만, 곧 울 것 같은 얼굴의 나를 달랬다. "엄마, 금방 올게. 여동생이랑 조금만 자고 있어."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집을 나섰다. 날이 밝아오자, 아빠는 한껏 초췌한 얼굴로 집에 들어왔다. 엄마 걱정에 잠을 설친 우리 자매를 보며, "엄마는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로 했어. 지금 입원 중이고 내일이면 동생이 나올꺼야."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나이었지만 복잡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새로운 동생을 맞이한다는 설렘, 그리고 엄마가 큰 수술을 한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교차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엄마는 나랑 3살 터울의 여동생을 출산할 때, 사경을 헤맸다. 당시 고작 4살이었지만 아직도 그 공포가 생생하다. 엄마랑 인형놀이도 하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은데 중환자실의 커다란 유리 문이 나를 가로막았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위독한 엄마의 상태에 분주했다. 과다출혈로 인해 혈액이 부족해 아빠는 사방팔방으로 피를 구하러 다녔고, 외할머니께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딸이 걱정되어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셨다. 나는 큰집에 맡겨졌고 보름 넘게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혹시나 엄마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행히 엄마는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무사히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포는 남아있었다. 엄마의 제왕절개 수술 당일 아침, 난 아빠 손을 잡고 산부인과 입원실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고 무서웠다. 엄마는 "우리 딸, 이따 보자"라며 애써 밝게 말했지만 난 계속 슬펐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엄마의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술이 종료되었다는 것은 10살 터울의 내 남동생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겠지. 

엄마가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동생이 생겼다는 설렘으로 신생아실로 내려갔다. 수술을 한 탓에 막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엄마를 위해 디지털카메라를 챙겼다. 떨리는 마음으로 신생아실 면회 전용 초인종을 눌렀더니 이윽고 커튼이 열리며 막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 & 아빠 이름이 써져 있는 전용 침대 위에 누워있는 막내를 보고 나는 '와'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직 붉고 쭈글쭈글하여 엄마, 아빠 중 누구를 닮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너무 사랑스러웠다. 더군다나 내 동생이라니...!

전담 간호사에게 허락을 맡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아빠도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3살 터울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이상 본인이 우리 집 막내가 아니기에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된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로 막내에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탄성이 저절로 나왔던 그날 이후, 어연 십여 년이 흘렀다. 작고 연약하고 귀여웠던 막내는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다. 언제쯤 다 크는 것일까 늘 궁금했는데 벌써 아빠보다 키가 훨씬 크다. 나와 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떨어져 살고 있는 탓에 한 달에 한 번씩 봐서 그런 것일까. 볼 때마다 커 있는 동생을 보면 아직도 실감이 안 날때가 많다. 

나와 여동생이 집을 떠난 지도 어느덧 4년이 흘렀다. 동생은 우리가 모두 빠져나간 집에서 홀로 남아 부모님의 에너지원이 되어주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부모님이 시키지 않아도 공부도 알아서 척척 하고, 생신부터 기념일까지 알아서 다 챙겨준다. 


멀리 살며 자주 못 보기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더 애틋한 것이 사실이다. 곁에서 많이 챙겨주지는 못하지만 자주 연락하려 애쓴다. 경주에 내려갈 때면 아울렛에 들러 남동생 옷을 한가득 고르고,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들을 꼭 산다. 주렁주렁 쇼핑백을 양손에 끼고 역에 도착해 동생에게 선물을 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늦둥이 남동생의 '큰누나,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면 또 험난한 회사 생활을 헤쳐갈 힘이 솟는다. 

그 아이가 20살이 되어서도, 30살이 되어서도, 40살이 되더라도 언제나 봐도 좋은 큰누나가 되고 싶다. 여자친구 생기면 부모님이 아닌 가장 먼저 내게 보여주고 싶을 만큼 다정하고 친근한 그런 큰누나. 사회생활을 하며 힘겹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든든한 그런 큰누나가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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