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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Dec 01. 2021

이토록 만족스러운 동네가 있었다니.

- 강남구 역삼동은 더없이 완벽한 곳입니다.

누군가 서울에서 가장 월세가 저렴한 동네가 '신림역' 부근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만 믿어서는 안 됐다. 내가 살 집이니 더 찾아봤어야 되는데, 난 덜컥 신림동에 서울살이 첫 집을 구해버렸다.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2년 가까이 살아보니, 딱히 월세가 저렴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서울대입구, 독산역, 문정역 쪽이 훨씬 더 방값이 착했다. 게다가 신림동 부근에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유동인구가 상당하다. 밤이면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취객은 물론,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까지 시끌시끌하여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집 자체가 깨끗하고, 회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서 2년을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가 '역삼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너무 좋다며 이사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생각보다 월세도 크게 비싸지 않고, 지하철역도 가까운 데다가 강남역까지 걸어서 단 15분이면 된다는 것이다. 솔깃했다. 평소 쇼핑을 하거나, 책을 사러 가거나, 약속이 있으면 강남역으로 자주 갔었던 터라 더더욱 친구의 제안이 흥미로웠다. 들으면 들을수록 당장 이사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아빠, 엄마가 월세를 지원해 주시는 상황이라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함께 사는 여동생의 허락도 구해야 했다. 역삼동만의 여러 가지 장점들을 줄기차게 어필하고, 당시 살고 있던 신림동 원룸과 비슷한 월세의 방을 찾아내자 결국 이사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부모님과 동생을 설득하여 오게된 역삼동은 살면 살수록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일단 진짜로 강남역까지 걸어서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가. 서점, 영화관, 식당, 카페는 물론 각종 브랜드 팝업스토어가 밀집되어 있는 강남역을 버스도 타지 않고 그저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9호선을 탈 수 있는 언주역도 가까웠다. 오히려 역삼역보다 언주역이 더 인접해 있다.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으니까. 9호선을 타고 김포공항으로도 빠르게 이동이 가능하고, 고속터미널역까지도 단숨에 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인분당선을 탈 수 있는 선릉역도 걸어서 8분이면 당도할 수 있다. 역삼역, 언주역, 선릉역과 모두 인접한 이른바 트리플 역세권인 것이다. 

하지만 역삼동의 가장 큰 진가는 주말에 발휘된다. 신림동에 거주할 때는 주말에도 늦게까지 낮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시끌벅적한 거리의 소리들이 계속하여 귓가를 울렸기 때문이다. 차량 통행량도 얼마나 많은지, 수시로 들리는 경적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역삼동은 퇴근 시간이 지나면 조용하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저녁 8시만 딱 넘어서면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다. 

또 직장인들이 모두 빠져나간 주말에는 정말 유령도시가 따로 없다. 한산한 동네를 거닐다 보면 여기가 경주인지 서울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회사에 가지 않는 토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고요한 동네 한 바퀴를 돈다. 배가 고프면 빵집에 들러 좋아하는 빵과 우유를 사서 돌고 돌아 집으로 돌아온다. 한 끼를 때우고 대충 옷을 주워 입고 10분 정도 걸어 강남역 교보문고에 간다. 지하의 핫트랙스에서 원하는 문구 용품들을 한가득 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마친 뒤, 올라와 본격적인 책 쇼핑에 들어간다.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 코너로 직진하여 신간들을 두루 살펴본다.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골라들고 베스트셀러 섹션으로 이동한다. '요즘은 어떤 책들이 잘 팔리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찬찬히 살펴본 다음 다시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오거나 아이 쇼핑을 한다. 그렇게 토요일을 보내고 나면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감쪽같이 증발한다. 

역삼동에는 아주 큰 교회가 하나 있다. 전 김영상 대통령이 다녔을 정도로 아주 큰 교회다. 이곳은 다른 교회들과 비교했을 때, 유난히 외관이 아름답다. 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관이 멋진 것은 사실이니까. 특히 밤에 보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가히 환상적인 야경을 자랑하니까. 마음이 답답할 때면 일부러 충현 교회 앞 벤치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그곳의 야경을 바라본다. 그럼 답답했던 감정이 조금은 해소되기도 한다. 

역삼동은 모든 것이 완벽한 동네다. 앞으로 또 이렇게 좋은 곳을 만날 수 있을까. 벌써 살고 있는 집의 2번째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간다. 집주인이 월세를 올리지만 않는다면, 몇 년 동안은 여기서 더 살고 싶다. 최소 2~3년 동안은 더 머무르면서, 역삼동만의 또 다른 매력들을 하나씩 천천히 찾아나가고 싶다. 아직도 내가 미처 모르고 있는 장점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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