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세이스트 Feb 18. 2022

때로는 나의 호의가 상대에게 부담이 된다면

동대구역에서 만났던 어떤 할머니와의 이야기

늦은 밤이었다. 대구에서 친구들과 한바탕 놀고, 경주로 돌아가기 위해 동대구역으로 들어섰다. 무궁화호를 타면 경주까지 아무리 못해도 1시간은 걸리기에 혹시 몰라 화장실에 들렀다. 볼일을 보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어떤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겨우내 동파 방지를 위해 설치된 라디에이터 앞에서 한껏 웅크리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 추운 겨울에 제대로 된 외투 하나 걸치시지 않고 차디찬 화장실 타일 위에서. 다 구겨진 신문지 두어 장을 깔고 앉아계셨다. 손을 씻으러 가는 중에도 내내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라디에이터가 켜져 있다고는 하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변변찮은 신발도 없으신지, 회색 양말에 슬리퍼만 신고 계셨다. 오랫동안 뭘 드시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러신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상하리만큼 왜소하셨다. 움찔하실 때마다 슬며시 보이는 발목은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앙상했다. 마음이 아팠다.

기차 시간에 쫓겨 급히 용변만 해결하려 오고 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할머니는 투명인간이었다. 다가가서 말이라고 건네보고 싶었지만, 물기 맺힌 손을 핸드드라이어에 말리는 사이 화장실 미화를 담당하시는 여사님이 들어와 그분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당장 나가라고, 아줌마 때문에 청소를 못 한다고 쏘아붙이시는 것이 아닌가. 청소를 제대로 해야만 윗선에서 싫은 소리를 듣지 않는 여사님의 상황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좀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가 나섰다. 차분한 톤으로 여사님께 말씀드렸다. 

'어떤 상황인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훨씬 더 어르신인데 이렇게 소리지르시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추워서 이렇게 웅크리고 계시는데, 담요라도 갖다드리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까지 하셔야 될까요?"라고 말했다. 내 말에 다른 분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그러자 무안해진 미화 여사님은 조용히 걸레를 들고 화장실에서 나가셨다. 

본인 앞에서 그 난리가 난 상황에서도 할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가끔 움찔하기만 하실 뿐.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시지도 않았다. 소란이 줄어들자 내 곁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화장실을 빠져나갔고, 나 역시 그러했다. 화장실에 나와서 대합실쪽에 앉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차 시간까지 2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남은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눈앞에 보이는 파리바게트에 갔다. 아르바이트생에게 6~70대 어르신들은 어떤 빵을 좋아하시냐고 물었다. 그는 곧바로 단팥빵이랑 백앙금빵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추천대로 두 가지 빵을 구입하고 흰우유 2개까지 샀다. 그리고선 다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할머니는 그 곳에 계셨다. 놀라실까봐 발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한 번, 두 번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그냥 빵 봉투를 앞에 내려뒀다. 빵을 담은 비닐이 움직이면서 바스락바스락 요란한 소리가 나자, 갑자기 할머니께서 고개를 드셨다. 깜짝 놀랐다. 아니 사실, 엄청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드시지 못했던 것인지, 얼굴은 홀쭉하셨고, 입 주변에는 하얀 무언가가 잔뜩 묻어있었다. 한 눈에 봐도 꽤 오래 무얼 못 드신 것이 자명했다. 할머니는 한 5초간 나를 뻔히 보시더니 내가 내민 빵 비닐봉투를 다시 내 발쪽으로 쓱 미셨다. 나는 설명했다. 이 빵은 할머니를 드리려고 사온거고, 배가 고프실 때 하나씩 드시면 된다고. 그냥 손녀딸 같은 마음에서 드리는거니까 받으셔도 된다고. 괜찮다고. 저 나쁜 사람 아니라고. 계속 말씀드렸다. 

한참을 내 설명을 듣던 할머니께서 입을 떼셨다. 
"아가씨... 마음은 고마운데, 나 누가 이런거 주는거 받아서 먹으려고 여기 있는 거 아니야."라고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속상했다. 난 그저 할머니께서 워낙 배가 고파보이셔서, 이 추운날 냉기가 흐르는 화장실 바닥에서 앉아계시는데 끼니까지 거르시면 더 힘드실 것 같아서 신경을 쓴 것이었으니까. 할머니의 단호한 거절에 표정이 굳었다.

우리의 상황을 지켜보시던 어떤 아주머니가 "어르신, 착한 아가씨가 주는 건데 그냥 받으세요."라고 거들어 주셨음에도 한사코 할머니께서는 거절을 하셨다. 점점 더 표정관리가 안 됐던 난 비닐을 들고 화장실 출구 쪽으로 걸어가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냥 다시 뒤돌아서서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안 드셔도 되니까, 일단 가지고만 계세요 그럼!" 이라고. 빵을 다시 할머니 앞에 두고 무어라 말씀하시는데 듣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기차에 올랐다. 


경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내 나름대로 호의라고 생각했으나, 할머니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저 당장 갈 곳이 없어 잠시 화장실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일면식도 없는 어떤 아가씨가 갑자기 먹으라며 빵을 내밀고, 다른 이들이 빵을 얼른 받으라고 권하는 상황이 충분히 불편하게 느껴지셨을 수도 있었을 듯하다. 아차 싶었다. 경솔한 행동이었던 것 같아서.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아서. 

기차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아니 화장실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나의 호의를 거절하신 할머니가 좀 야속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미웠다. 그냥 받아주셨을 수도 있는데 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시면서까지 한사코 거절을 하시는 것인지. 오로지 내 입장에서 생각한 날 나무랐다. 그것도 아주 호되게. 

그리고 이주쯤이 흘렀을까.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대구에 갔다가 다시 동대구역에 들를 일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에 갔는데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할머니께서는 계시지 않았다. 그해의 겨울은 예년보다 유난히 추웠는데, 부디 할머니께서 좋은 휴식처를 찾으셔서 겨울을 무사히 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작가의 이전글 경주 누군가의 책방에 다녀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