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 오, 나의 청중

by 이유하

늦은 점심을 먹고 5교시 시작종이 곧 울릴 시간.

양치를 끝내고 도서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문 앞에서 여자아이 두 명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책 빌리러 왔니?”

긴 생머리에 나와 눈높이가 비슷한 두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본다.

“사서 선생님이세요?”

“응. 내가 사서 선생님이야. 도서관엔 처음이구나?”

둘이서 눈빛을 주고받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는 말을 남기고 도서관 안으로 황급히 들어간다.

두 아이가 품은 뜻을 알 수가 없다.

젤리 때문인가? 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책을 들고 책상 앞에 서 있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다.

바코드를 여러 번 찍은 후,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가에 서서 나를 부르는 서 선생님 목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끝나고 저녁 먹을까? 약속 있어?”

서 선생님은 학교에서 나와 가장 친밀한 동료이자 내가 의지하고 싶어지는 어른 사람이기도 했다.

“주말에 먹어요~”

내 말에 입술을 쭉 내민 서 선생님은 “애인도 없으면서~ 뭐 하는데?”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뛰어야죠~”

“또?? 요 앞에 공원?? 그럼 다 뛰고 배고파지면 콜~”

운동은 질색인 서 선생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지고 다시 아이들과 고개를 맞대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젤리를 받은 아이들을 배웅하고 오늘의 시들을 쭉 다시 한번 읽고 난 뒤에 가벼운 청소를 시작했다.

아까 서가 안으로 몸을 감춘 두 아이도 언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운동화 끈을 고쳐 묶으며 서 선생님 얼굴을 떠올렸다.

예전의 나는 내 사람들을 위해 참는 게 습관이었고 싫은 소리도 쉽게 하지 못했는데 이 일을 하고부터였을까.

나에게 더 집중하게 되자, 하고 싶은 말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가지고 태어난 기질은 어쩔 수 없는지 아까 저녁 약속을 미룬 건 조금 마음이 쓰였다.

‘세 바퀴만 돌고 맥주 한잔 마시자고 전화해야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이 날씨가 나는 참 좋았다.

낮엔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았지만, 해가 지면 거짓말처럼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아무리 피곤해도 저녁 러닝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주말에는 단풍을 보러 등산에 가야지.

낙엽을 주워 깨끗하게 털어서 아이들에게 선물해야지.’

이런저런 생각들의 말풍선과 함께 두 바퀴를 뛰었다.

오늘따라 가벼운 몸 덕분에 평소보다 3분 정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열이 오른 몸을 가을바람으로 식히며 걷고 있는데

“안녕하세요.”

‘화들짝’이라는 단어가 표정으로 있다면 지금 내 얼굴 그 자체일 거다.

예기치 못한 인사에 놀라고 단번에 알아챈 그 목소리에 두 번 놀랐다.

‘왜 하필 지금.. 땀났는데.. 하..’

고개를 들어 가로등 조명을 받아 오늘따라 더 커다란 사람.

그리고 더 그윽해진 눈이 나를 보고 있다.

“헉..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깜짝 놀랐어요.”

이마 위에 땀들을 손으로 대충 닦아내 보지만 올라오는 민망함을 감출 길이 없다.

시집이 잘 있다는 이야기도 귀여운 해랑이의 이야기도 다 반가웠지만 주어만 들리고 뒤에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모자 쓴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문구점이라는 배경이 없어지자 처음으로 그가 온전히 보였다.

아이들에게 짓던 눈웃음이 가까이에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달리고 나면 집에 가는 길이 어두워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 내게 오늘 밤 함께 걷고 있는 이 남자가 참 든든하고 마냥 고맙게 느껴졌다.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 들렀고 몇 가지를 사서 다시 거리로 나왔다.

걷다가 보인 벤치에 약속한 듯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소소한 인사처럼 건네는 그의 말에 혼자서 눈팅했던 몇 장의 기억들이 눈앞에 지나갔다.


그날 밤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여전히 낯설고 신기하다.

눈에 익숙하고, 아이들 덕에 귀에 익숙해진 그의 일상을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예습한 까닭이었을까.

벤치에서 우리 둘의 첫 대화는 일방적인 나의 독백이었다.

주목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주연보다는 조연이 차라리 편했던 내가 독백이라니.

그런 나를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고 고백의 쉼표마다 그는 질문으로 반응해 줬는데,

아이의 입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맑은 시선에 놀라기도 했다.

분명 시를 모른다고 한 남자의 입에서 받아 적고 싶은 말들이 흘렀다.

좀 더 자세히 그를 쳐다봤다.

스쳐 보낸 순간들이 그에게 지극히 단편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문구점 속에서 그는 두 장의 카드만 꺼내 쓰는 사람 같았다.

굳이 설명하자면 눈에 웃음을 지어야 할 때와 눈에 힘을 주어야 할 때랄까.

두 장의 카드만 닳아지는 사연이 있는 걸까.

애써 여러 장의 패를 내보이지도 쓸 생각도 없어 보이는 사람.

갑자기 애처롭게 느껴지는 사람.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의미 있는 누군가에게 거처 없이 모든 패를 꺼내 보일 것만 같은 사람.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쌍꺼풀도 있다. 그것도 꽤 진한.

어린 시절, 화를 내지 않아도 아빠가 눈에 힘만 주면 서럽게 울던 기억이 난다.

오랜 시간 나를 크고 진하게 안아주었던 아빠 탓이었을까.

그의 눈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그런 깊음이 있었다.

내 이야기에 이어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만 것 같은 그의 표정을 본 것 같은데..

그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서도 밤새 그 표정이 눈에 밟혔다.

아이들에게 거인은 한없이 크고, 세고, 단단해서 자꾸만 그 품으로 파고들고 쓰러지고 싶은 존재겠지.

그럼 거인은 누가 안아주지?
쓰러지고 싶을 땐 더 큰 거인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런 그 옆에 서면 나는 아이만큼 작은데.


‘두 손으로 나를 들어 풍선처럼 후후 불어주고 커다랗게 만들고 싶다.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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