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반찬

계랄과 짐(김)

by 헤리나

내가 젖을 막 뗀 어린 아기였을 때 엄마가 큰 병일지 모르는 수술을 하게 되었다. 돌볼 손이 없어진 나는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아빠는 혹시 엄마가 마지막일까 봐 입원 전에 설악산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셨다.

엄마도 엄마가 마지막일까 봐 겁이 났었나 보다. 여행 사진 속 표정이 이상하게 청순했던 이유를 나중에 이해했다.

수술은 잘 되었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두 분만의 시간이 좋았던 건지 엄마아빠는 내가 초등학생이 되자 방학마다 나를 할머니댁에 보내셨다. 할머니는 들기름에 부친 달걀프라이와 기름 발라 연탄에 훌훌 구운 김을 올린 밥상을 들고 와 “서울 아~들은 뭐가 맛있는고 몰라가 만물쟁이 트럭 왔을 때 계랄 한판 하고, 짐(김) 사논기 다재 뭐 니 이런 거 묵나? “ 하며 상을 내려 계란과 김을 내 앞으로 밀어주셨다. 김을 집어 입에 가져가는 것을 보고 할머니도 수저를 들어, “ 니는 아이 이런 거는 물지 모르재? “ 하시고 밥풀 넣어 국물이 뽀얀 열무김치를 보리밥에 슥슥 비벼 맛있게 드셨다.


시골 생활 일주일쯤 지나면 아빠가 부친 소포가 한 박스 도착했다. 그 안엔 집 근처 삼양슈퍼에서 골라 산 과자와 캐러멜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조미료, 국수 등 식재료만 있고 과자는 몇 개 없는 시골 살림집 점빵을 대신해 보내신 한 달 치 간식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며 나도 매일 놀아야 하는 동네 단짝이 생기니 할머니 댁에 한 달씩 가있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간 어린 나를 보내 한동안 할머니를 귀찮게 하는 것이 재롱이고 효도라 여기셨던 아빠지만 “그래 가기 싫으만 안 가도 된다~ 여 있어라~“ 하고 대번에 허락하셔서 방학 시골행은 그렇게 쉽게 중단됐다.


시골에서 낮에는 잘 놀다 해가 넘어가려 하면 가슴이 선득하고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그런데 혹시 할머니 섭섭하실까 봐 창문을 노려보고 고개를 젖혀가며 안 들키게 참았었다.

한 달 여를 할머니와 지내고 서울로 올라올 땐 기차밖에서 배웅하는 할머니의 쓸쓸한 뺨을 보는 것이 힘들어서 또 한참 울며 올라왔다. 그런 이별의 과정을 이젠 안 해도 된다니 왠지 안심이 되었다.


중학교 때 처음 접한 한국 현대문학에 단숨에 빠진 것이 시골에서의 기억을 꺼내주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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