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잔에 술을 채우기 시작한 건 밤 9시쯤이었다. 누군가는 술자리나 모임을 마치고 귀가할 때, 나와 친구는 거침없이 첫 잔을 입에 털었다. 그래, 이 맛이지. 집에서 더러 혼술을 했는데 함께 먹는 술맛은 역시 더 좋다.
나는 아기를 막 재우고 나온 길이었다. 하루의 모든 미션을 완료한 난 아내에게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며 집을 나섰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친구는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들러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한 후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근무 형태(?)는 다소 달랐지만, 어쨌든 우린 둘 다 퇴근을 한 셈이다. 나도 친구도 지친 얼굴이 역력했지만 하루의 마무리를 조금은 특별하게 할 수 있어 들떠 있었다.
"이제 아기 통잠 자냐?"
"왔다 갔다 해. 어느 날은 7시까지 자더니, 또 어떤 날은 새벽 3~4시에 배고프다고 깬다."
두 아빠의 대화는 자연스레 육아 이슈로 시작됐다. 나보다 10개월 먼저 아빠가 된 친구는 종종 이런저런 경험담을 공유하곤 했었다. 술잔을 몇 번 비우면서 대화는 무르익었다.
"와이프가 XXXXX이란 아이 옷 브랜드에 꽂혀서 난리야. 옷이 예쁘긴 한데, 비싸다ㅠ"
"와, 제수씨도 그러냐? 우리 와이프도 매일 거기 옷 검색해서 보는데. 요즘 엄청 핫한가 보다."
아기 옷부터 기저귀는 뭘 쓰고 분유는 뭘 먹이는지, 이유식은 어떻게 하는지, 어린이집은 언제쯤 보내는지, 층간소음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슨무슨 매트를 깔았다든지... 두 남자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다.
아들 몰래 먹는 술이 제일 맛있다(직접 찍은 사진 아님)
고3 시절을 함께 보내고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구지만, 문득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가 신기했다. 연애나 진로 문제, 축구 따위를 주제로 했던 우리 대화는 이제 8할이 '육아'다. 특히 비슷한 또래의 남자 아기를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 통하는 게 많았다. 출산 직후 이런저런 육아 용품과 옷을 챙겨준 것도 그 친구였다.
이날도 친구는 조카 선물이라며 새 옷 한 벌을 내게 건넸다. 사둔지는 꽤 됐는데, 정작 바빠서 만날 기회가 없어 주지 못했다고 한다. 상자를 열어보니 한 여름 바디슈트다. '여름이 다 지나서 이거 못 입겠는데?'란 생각을 하다가, "겨울에 내복으로라도 어떻게든 입힐게. 챙겨줘서 고맙다"라고 답했다. 친구 얼굴이 환해졌다.
빠른 시간에 소주병 몇 개가 쌓이고, 나와 친구는 얼큰하게 취했다. 이쯤 되면 대화 주제는 늘 고교시절 자율학습이나 점심시간 축구 얘기다. 같은 레퍼토리지만 질리지 않는다. 아마 둘 다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옛 추억을 안주삼아 몇 잔 더 마셨다.
늦게 만났다고 늦게 헤어지는 건 아니다. 자정 무렵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녹록하지 않은 일상, 아빠들의 신기루 같은 술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짧은 시간,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속에 뭉쳐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어떨 땐 편한 사람과 그저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한다.
돌아온 집에선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다행이다. 아들이 깨지 않고 잘 자고 있다는 걸 눈으로 다시 확인했다. 아들이 잠든 사이, 성공적인 일탈을 마친 나는 술기운에 스르르 잠들었다. 새벽 수유를 떠맡은 아내에겐 눈치가 좀 보였지만... 오랜만에 즐거운 술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