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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영 Sep 30. 2022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34

'깨꿍!'

이틀 만에 만난 아이에게 우리 부자(父子) 시그니처 인사를 건넸다. 내 눈과 마주친 아들은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방긋 웃는 표정을 기대했던 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에 영화 대사 한 줄이 튀어 올랐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것도 단 45시간 만에.


우리 부부는 이사라는 거사를 하루 앞두고 처가댁에 아이를 맡겼다. 아이와 함께 큰 짐을 옮기고(물론 포장이사업체가 수고해주시지만) 정리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했다. 이른 시간 아이를 목욕시키고 대규모 육아용품을 장모님 댁으로 운반하는 '사전 이사' 작업을 실행했다.


사실 아들이 낯선 곳에서 큰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자동차 트렁크 가득 짐을 실은 것도 원래 살던 집과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수유 간격부터 장난감 사용법, 재우는 요령까지 메모장 가득 적으며 장모님에게 '주입식' 교육을 했다. 아이와 작별 인사를 할 땐, 혹시 엄마아빠가 사라지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아니 다소 서운하게도 기우였다. 아들은 부모가 없는 환경에서 분유도 잘 먹고, 똥도 잘 싸고, 잠도 잘 잤다. 이사 작업 중간중간 영상통화를 걸었을 땐, 엄마아빠 따윈 안중에 없이 '국민 장난감' 에듀테이블을 열심히 눌러 대며 놀고 있었다. 날 닮아 무언가 심취했을 때 삐죽 튀어나온 입마저 그대로였다.

'XX아, 아빠야. 아빠라고. 여기 봐봐~'

민망한 육성만이 허공을 갈랐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말을 새삼 실감했다.


장모님의 '마이크로' 육아 일지가 실시간으로 공유됐다.

11:00 - 분유 220ml 먹고 모빌 잠깐 보다가 눕기 싫다고 울어댐. 안아주니 아주 좋아함

13:20 - 업혀서 잠들기에 바닥에 눕히니 잘 잠

15:20 - 분유 먹고 트림 잘함. 혼자서 잘 놀아요

(중략)

18:20 - 응아 예쁘게 쌌어요. 모빌 보며 잘 놀고 있어요

장모님의 수고 덕분에 맘 편히 이삿짐을 정리할 수 있었지만, '나 없이도 이렇게 잘 지낼 수 있는 아이였'하는 출처 모를 서운함도 조금 들었다.


이튿날, 짐 정리를 얼추 마친 후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처가댁을 찾았다. 나를 보고 환히 웃어줄 아들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아내도 '아빠바라기 아들이 엄청 좋아하겠다'며 기름을 부었다. 현관문을 열고 힘차게 외쳤다. '깨꿍!'


그리곤 상술한 '참사'가 벌어졌다. 수 없이 '깨꿍'을 외쳐도 멍하니 쳐다보거나 딴청을 피울 뿐이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몰랐던 것처럼. 아들은 이틀 동안 자신과 함께 하지 않았던 아빠를 잊은 게 분명했다.'아직은 엄마아빠를 기억 못 할 만큼 어려서 그렇다'는 장모님의 위로도 와닿지 않았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작은 배신감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존심을 버리고 아들의 웃음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과장된 몸짓과 애교 어린 말투로 식어버린 그의 마음을 공략했다. 30분쯤 지나서야 아이는 '피식'했다. 만족할만한 리액션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동하고 있단 증거에 안도했다.


아이와 함께 이사한 새 집으로 돌아와서도 난 최선을 다했다. 짐 정리를 잠시 미루고 여러 장난감을 동원해 놀아줬다. 비로소 목욕 시간이 돼서야 아들은 아껴둔 웃음을 보여줬다. 마치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은 기분이랄까. 이후엔 평소처럼 먹이고 재웠다. 그리고 늘 그렇듯 나를 보며 환히 웃었다. 다행히 아빠에 대한 기억을 다시 소환해낸 것 같았다.


이사라는 위기(?)가 우리 부자 사이를 좀 더 단단하게 해줬을까. 아이가 어서 자라 아빠와의 즐거운 시간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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