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13
사회생활 첫해에는 동기들과 놀러 다니거나 회사가 요구하는 자격증을 따느라 바빴다. 또한,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님의 성화에 여자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했었다. 나는 구의동에서 여의도까지 지하철로 1시간 거리를 출퇴근하였다. 강남역에 사람들을 토해놓고 구의역으로 올라온 지하철은 빈자리가 많았다. 6개월 이상 지하철을 타다 보니 어느새 나도 점쟁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다음 역에서 내릴지 나도 모르게 얼굴과 태도를 보고 맞추기 시작했다. 한동안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었다. 그래서 매일 보게 되는 얼굴들이 점차 늘어났다.
어느 날 내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여의도역에서 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내일도 매일 그 시간이 되면 그녀는 어김없이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녀는 긴 생머리에 훤칠한 외모로 성격이 좋아 보였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녀가 안 보이는 날이면 ‘회사를 그만두었나!’ 하는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그녀는 왕십리역 근처에서 올라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여의도역에 내릴 때마다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자’고 나 자신을 독려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한 달의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날 그녀는 여의도역에서 사라지지 않고 한참 동안 누군가를 기다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지하철에서 자주 봤다고 얘기했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언제 차나 한잔하자며 그녀의 손에 명함을 쥐여줬다. 그리고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얼른 얼굴을 숨기고 회사로 도망쳤다.
며칠이 지나자 B 대리는 나에게 “요즘 결혼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나 봐!”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태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B 대리는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에게 명함을 주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지하철의 그녀는 인사팀 여직원의 동생 친구였다. B 대리는 인사팀 여직원과 업무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이다. 여자친구를 사귀려는 나의 노력은 가상했으나 지하철의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 다리만 건너면 다 알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추석 때 만난 고향 친구는 자기 회사의 입사 지원자 중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다름 아닌 인사팀 여직원이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쉬다가 다시 입사원서를 낸 곳이 하필이면 친구가 다니는 회사였다. 다행히 그녀는 친구에게 내가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세상은 넓은 것 같으면서도 참 좁다. 이제 이 일은 이십 년도 넘은 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금 같으면 스토커라고 범죄자 취급을 했겠지만, 그때는 낭만으로 포장할 수 있는 순수의 시대였다.
잠시 내 인생을 채웠던 그녀는 온데간데없는데 그때의 상념들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맴돌고 있다. 그렇게 설레고 두려웠던 나의 도전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까마득히 잊혔던 그녀가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나타나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그녀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그저 세월이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갔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나는 잘살고 있으니 그녀도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으면 좋겠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은 세월이 황당하게 빠르다고 말한다. 세월은 나에게 의미를 부여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나의 기억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다. 그래서 세월은 그녀도 어디론가 데려간 것이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언젠가 내 기억도 시간 속에 흩어지겠지만 모든 순간이 소중했기에 지나간 날들이 그립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