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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범진 작가 Feb 16. 2024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

관계 10

몇 해 전부터 알게 된 무늬만 친척인 사람들을 더는 만나지 않기로 하였다. 만나면 기분만 상하고 소중한 시간을 왜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지 의문만 생긴다. 평상시 정말 연락할 일이 없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아버지를 따라 벌초(伐草)하러 다니곤 하였다. 산소가 이 산(山) 저 산에 흩어져 있어서 어느 산소가 조상의 산소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벌초하러 다니셔서 풀이 덮인 숲길을 헤집고 잘도 찾아내셨다.     


아버지는 산소가 있는 여러 산 중 유독 그 산에 나를 데려갔다. 그 산은 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는 산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내가 관리해야 한다. 산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것도 없다. 그 산은 금강 물줄기 옆에 맞닿아 있어서 상수도보호를 위해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또한 그 산은 대부분 무덤으로 덮여 있어서 금전적 가치가 별로 없다. 시골 마을과도 한참 떨어져 있어서 아파트나 골프장이 들어설 가능성이 거의 없다.    

 

내가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는 오기 힘들다며 아버지 혼자 벌초하러 가셨다. 지방으로 내려오니 벌초하러 갈 때마다 나를 부르셨다. 벌초하러 가면 족보상으로만 친척인 사람들을 만난다. 아버지 명의로 된 그 산은 당연히 할아버지가 주셨다. 그 산에는 많은 무덤이 있는데 무덤 주인이 모두 직계(直系) 조상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중학교 선생님을 하셨다. 그때 당시 6.25 전쟁이 끝난 직후라 선생님은 동네에서 존경받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시골은 같은 성(姓)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서 동네 사람들은 모두 먼 친척이었다.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지역 유지(有志)가 되어 사람들을 돌보셨다. 할아버지는 종중(宗中) 일에도 깊이 관여하셔서 무슨 일만 생기면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래서 어렸을 때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보면 항상 방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할머니는 찾아온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느라 바쁘셨다. 한쪽 방에는 마작(麻雀)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방에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또 다른 방에는 잠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베푸셨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다시 할아버지를 찾기 시작하였다. 가난하고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은 부모님을 모실 묏자리가 없어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인심 좋고 책임감이 강한 할아버지는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산에 동네 사람들이 묏자리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산은 동네 사람들의 묏자리로 채워졌다.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호의(好意)에 보답하기 위해 명절만 되면 우리 조상의 산소까지 벌초해 주었다. 또한, 농사지어 수확한 과일이나 쌀도 주었다.      


또 세월이 흘러 그때의 동네 사람들은 사라졌고 이제 그 후손들만이 산소를 찾는다. 그 후손들은 여전히 아버지와 알음알음이 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그 후손들 간에는 잘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그 후손들은 명절만 되면 벌초하기 위해 할아버지 아니 아버지의 산을 찾는다. 

     

몇 대(代)위에서 갈라진 후손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반갑게 인사하곤 했었다. 문제는 이 후손들이 더는 그들의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사람들이 우리 조상의 산소도 벌초해 주었지만, 그 후손들은 그것을 알 리 없다. 그 산에는 직계 조상의 산소가 하나밖에 없어서 우리가 직접 벌초해도 된다. 그들에게 서운한 것은 아버지 명의의 산을 종중산이라고 생각하여 그 산을 종중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떤 만둣가게 주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분은 노숙자들이 추위에 떨며 배고파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그들에게 무료로 만두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숙자들이 만둣가게 주인을 천사라고 칭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노숙자들은 무료로 나눠주는 만두가 너무나 당연한 그들의 권리로 착각하였다. 어느 날부터 노숙자들은 만둣가게 주인에게 만두 말고 다른 것도 줄 수 없냐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매일 만두만 먹다 보니 질리고 맛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마음씨 착한 주인은 그들에게 만두를 주지 않으면 굶어 죽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병이 나서 며칠 가게 문을 닫게 되었다. 배가 고픈 노숙자들은 주인을 찾아와 만두를 줄 수 없으면 돈이라도 달라며 생떼를 부렸다. 인간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다. 만둣가게 주인의 선의(善意)를 받아들이기에는 세상이 너무 썩은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반평생을 살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면 다음에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로부터 받는 마음의 상처는 더 아물지 않는다. 아니, 아물 시간이 별로 없다. 처음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아예 문을 닫아버린다.     


작년 명절부터 아버지는 부쩍 다른 문중의 태도에 화를 내셨다. 아버지는 간암 수술을 받으셨지만, 무늬만 친척인 그들 중 누구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은 친척도 아닌 전혀 모르는 남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고, 할아버지의 배려가 묻어 있는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그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하셨다. 그들이 아버지의 산을 종중산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아버지는 읍사무소에 가서 자기 소유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하셨다. 그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기로 했다. 최근에 그 후손 중 하나가 아버지에게 그 산에 자기 묏자리를 쓰게 해달라고 요구했나 보다.     


살아보니 무늬만 친척인 사람들은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전히 부모님은 그들이 같은 조상 아래 맺어진 형제라며 소중히 대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동안 그들과 교류할 일이 없을 것 같고, 내 아이들은 더욱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웃사촌이 인생의 고민과 행복을 공유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의미 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이 맞는 걸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세월은 내게 원하는 대로 살라고 말한다. 하기 싫고 귀찮은 일은 무조건 피하라는 뜻이 아니다. 남은 인생이 짧아질수록 황금 같은 시간을 공유할 사람들이 더 명확해질 뿐이다.      


인생에서 친척은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친척은 서류상으로만 친척인 사람들이다. 살면서 만난 적도 없고 만날 일도 없는 화석 같은 사람들이다. 그나마 이런 사람들은 화석처럼 내 인생에 그냥 박혀 있기만 하다. 두 번째 친척은 인생을 간섭만 할 뿐 도움을 주지 않는 친척이다.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을 것만 호시탐탐(虎視眈眈) 노리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얻을 것이 없다고 느끼면 금방 등 돌릴 사람들이다. 세 번째 친척은 서류에 있든 없든 인생의 소중한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이다. 인생의 유한한 본질을 깨닫고 서로를 위로(慰勞)하며 아껴주는 사람들이다. 잠시라도 시야에서 사라지면 서로를 걱정하는 사람들, 그 모두가 친척이 아니던가! 동물의 본능인 종족 번식으로 맺어진 친척보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고 싶다.      

서류상 친척이라는 이유로 말을 함부로 내뱉어 마음에 생채기를 내놓는다다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며 그것을 덮어 버린다친척이니 그렇게 해도 될 거라며 남들보다 더 못한 대우를 한다인생에서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친척이라고 생각한다어리석은 사람들과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인생이 방향을 잃고 헤맬 때 비로소 등대 같은 사람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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