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가? 아니면 세계는 그저 존재할 뿐인데 우리가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인가? 이 글에서 내가 이야기하려는 바는 세 번째 질문에 가까울 것이다. 존재하는 세계 가운데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어떤 대상이 있다면, 이 사태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2)
화사한 봄날이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거닐던 산책로가 연분홍 꽃잎으로 가득했다. 다른 날에 비해 사람들이 유독 많았지만, 내밀한 장소라 그런지 붐비지는 않았다. 꽃이 머지않아 모두 저물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접어둔 채, 산책로를 걸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3)
어떤 소리를 들으면, 세계의 색채가 바뀐다. 그 소리는 노래일수도 있고 대화일 수도 있다. 무미건조한 세계로부터 모종의 정서를 끌어낸다. 세븐틴의 ‘청춘찬가’를 들으면 세계는 파도빛으로 가득해지고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들으면 달빛으로 들어찬다. 청량함과 아득함 가운데서 세상은 요동친다. 용기가 샘솟는다. 우리 정신 어딘가에 보존된 과거, 개인의 존재론적 시원(始原), 이들이 팝콘처럼 튀어 나오는 식이다. 날달걀 잡듯 조심히 거머쥐며 나는, 이 순간을 아름답다고 규정한다.
(4)
매일 이러한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친다. 그랬던 것 같다. 벚나무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꽃잎을 보며 혹은 시절 지나 허공에서 나풀거리는 꽃잎을 보며, 오후 다섯 시 즈음 저물 준비를 하고 있는 햇살에 산들바람의 압력에 못이겨, 이리저리 반짝거리는 나뭇잎들을 응시하며,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끝없는 행렬을 감상하며, 덧없음을 느끼며.
(5)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어쩌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존재하는 유물이나 작품 따위일 텐데, 이들에 압도당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이 ‘좋다’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아니다. 어떤 구조가 부여된 쇳조각이나 물감에 불과하다. 존재성이 언제나 보장된다면 그것은 피부와 다름없다. 나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겉표지일 따름이다. 신생아의 피부는 경이롭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노화한다. 볼품이 없어진다고 표현하기보다 익숙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곳에 아름다움이 자리할 공간은 없다.
(6)
아름다움은 찰나의 속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느껴지는 무언가. 웅장함이나 숭고함 따위도 삽시간에 썰물처럼 다가온다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그들과 다르다. 좀처럼 박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그 순간에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움이란 정확히 말해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지’다. 그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아름다움은 이미 소실돼 버렸기 때문이다.
(7)
아름다움은 언제나 사라지기 때문에 무한하다. 사라진 아름다움은 다시 생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 대한 기억만을 남긴 채 소멸한다. 하지만 우리는 착각한다. 아름다움은 반복된다고. 지난해 봤던 벚꽃이나 올해의 벚꽃이나 매한가지라고. 똑같이 아름답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수차례 봐왔던 벚꽃을 또다시 보는가. 그것은 동일한 양태의 반복에 불과할 터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아름다움에서 찾는다. 꽃놀이의 경험을 ‘관성’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고 ‘설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들이 봄날을 명확하게 포착할 수 있을까.
(8)
우리의 감각 가운데 어떤 것으로 포착되는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데다 정체도 불분명한 그것을 구태여 규정해야 하는가. 오로지 명멸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필요한가. 설령 아름다움의 존재를 인정하더도, 그것을 앞서 언급한 의미로 정의한다면 오남용될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이것도 아름답고 저것도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아름답다면 아름답다는 말은 무의미하지 않은가.
(9)
아름다움은 우리의 이성적 사고를 초월한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과거와 시원이 총체적으로 동원되며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명명(命名)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발화되지 않더라도 성립가능하며, 반대로 발화되더라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직관만이 그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아름다움이 오남용된다는 가정은 성립할 수 없다.
(10)
어떤 사태를 아름답다고 칭하는 일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둥소리처럼 단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작용일지라도 말이다. 현상에 대한 규정은 동시에 그 현상을 창조해 낸다고 믿는다. 어떤 사태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사태가 미묘하게 변화하고 결과적으로 사랑의 순간으로 바뀌는 것이 비근한 예다. 사태에 대한 단순한 규정이 규정을 초월해 사태를 새로이 창조해 내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정의가 필요한 이유다.
(11)
기억에 담기지 않는, 오직 현재적 사태로서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관한 사태를 우리는 처절하게 직관해야 한다. 감각과 인지를 넘어서야 한다. 그 장면과 소리와 분위기에 압도돼야 한달까. 나는 믿기 때문이다. 무용해 보일지도 모르는 이 행위가 우리의 삶과 생애를 견인해 나가는 동인(動因)이라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삶은 매번 새로워질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고.
(12)
피고 지는 마음을 알아요/다시 돌아온 계절도/난 한동안 새 활짝 피었다 질래/또 한 번 영원히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잔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