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아내가 없는 집

딸 셋 아빠로 산다는 것

by HIPE


아내가 여행을 갔다.


새벽 서울역은 조용했고,
캐리어 바퀴 소리만 덜커덕 덜커덕 울렸다.


아내는 차 안에서
제주 대신 경주로 바꿨다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이 보채서... 너무 오랜만이잖아.”
“근데 좀 미안하네. 요즘 형편도 그렇고.”


아내는 늘 그렇게 말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괜찮다는 얼굴로 웃는다.


나는 그 웃음이
집을 얼마나 오래 버티게 했는지
가끔 늦게 안다.


아내가 없으면
집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그런데
집의 리듬이 바뀐다.


밥은 있는데,
식탁이 조금 허전하고


빨래는 돌았는데,
수건이 제자리에 없고


불은 켰는데,
거실이 덜 밝다.


아내가 하던 일들은
크게 보이지 않아서 더 크다.


저녁이 됐다.


큰딸은 이어폰을 끼고
밥을 먹었고,


둘째는 젓가락을 들었다가
휴대폰을 한 번 더 봤고,


막내는 반찬을 고르며
괜히 투덜댔다.


나는 평소처럼
“학교 어땠어?”를 꺼내려다가
그냥 삼켰다.


말이 나오면
그 말 뒤에 따라오는 것들이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 것 같았다.


큰딸이 먼저 말했다.


“엄마 어디 갔지?”
“경주.”


“얼마나?”
“며칠.”


큰딸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밥을 먹었다.


그 무심함이
괜히 어른 같았다.


둘째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아이가 아니라,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된 것처럼.


막내가 그때 물었다.


“아빠. 엄마 없으면… 집이 좀 이상해.”


나는 웃었다.


“왜. 아빠 있는데.”


막내는 잠깐 나를 보더니
작게 말했다.


“그래도… 좀 무서워.”


그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막내는
사춘기 시작하면서부터
표정이 단단해지고
말이 까칠해졌는데,


그날은
어린애 같은 문장이 나왔다.


나는 그 문장이
오히려 고마웠다.


아직
나한테 오는 길이 남아 있다는 뜻 같아서.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을 닦고 있을 때였다.


큰딸의 휴대폰이 울렸다.


큰딸이 화면을 한 번 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목소리가 아주 조금 풀렸다.


“엄마래.”


막내가 재빨리 달려왔다.


“엄마 뭐라 그래?”


큰딸이 짧게 읽었다.


“잘 도착. 기차에서 잠깐 잤어.
너희 밥 잘 먹고, 아빠 말 잘 들어.”


둘째가 방에서 나왔다.


평소 같으면

문틈으로 듣고 말았을 텐데,
그날은 거실까지 나왔다.


둘째는 큰딸 휴대폰 화면을
멀리서 한 번 보고


“다행이다.”
딱 그 말만 하고 다시 들어갔다.


막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엄마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아내의 존재가
메시지 한 줄로도 집을 정리한다는 걸 알았다.


아내는 집에 없어도
집을 잡고 있었다.


밤이 됐다.


큰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둘째도 문을 닫았고,
거실에는 TV 소리만 남았다.


나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연락이 오지 않는 일들이 있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있고,
계산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생각이 조금 늦게 올라왔다.


막내가 이불을 끌고 나왔다.


“아빠… 나 오늘 같이 자면 안 돼?”


나는 잠깐 망설였다.


막내는
예전에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그게 당연한 줄 알았던 거다.


나는 침대를 조금 옆으로 밀었다.


“와.”


막내는 그 한마디를 하고
내 옆으로 들어왔다.


이불 안에서
몸을 조금 웅크리더니
내 팔을 잡았다.


말이 줄어든 아이가
손은 남겨두는 방식.


나는 그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집은 조용했고,
아내는 경주로 갔고,
딸들은 각자의 방에서
자기 세계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아빠로 남아 있다.


아내는 늘
나보다 먼저 집을 붙잡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내가 없는 집에서


나는 그 역할을
조금 더 또렷하게 배운다.


불을 끄기 전
막내가 작게 말했다.


“아빠, 내일 엄마 와?”


“응. 곧 와.”


막내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잠들었다.


오늘도 아이들은 자라고
그들의 세계는 커가고 있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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