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봄을 맞은 사람들이 벚꽃 잎을 맞으며 가로수 길을 걷는다.
"엄마! 저 이거 사주세요!"
어린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솜사탕을 가리키며 엄마 손을 잡아끈다.
"조금 전에 닭꼬치 먹었는데 또 먹어?"
"응! 엄마! 먹고 싶어!"
뒤에서 아빠 손을 꼬옥 붙잡고 있는 여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사줘!"
엄마는 두 아이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어머, 우리 공주님도?"
아이들의 엄마는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솜사탕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지폐 한 장을 내민다.
"두 개 주세요."
"와! 엄마 최고!"
할아버지가 아이들 얼굴처럼 큰 솜사탕을 건넨다.
"할아버지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향해 밝게 웃는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 사이,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가 그들을 스쳐 지나간다.
사내의 모습은 너무 초라해서,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존재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우려는 듯, 그는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쌌다. 마치 죽은 사막을 홀로 떠도는 방랑자처럼, 고독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행복한 웃음이 가득한 거리에서도, 그의 눈은 오직 벚꽃과 하늘만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는 서둘러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를 벗어났다. 도로변에 멈춰 선 순간, 손을 든 그에게 수없이 지나가던 차량 사이로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서면 롯데백화점으로 가주세요.”
이어폰을 꽂은 채 뒷좌석에 앉은 사내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택시가 도로를 가르며 달리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최근 정세를 전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앞 정권의 실책으로 무정부 상태가 들어선 지 두 달째입니다.]
[집권 세력을 둘러싼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조기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내가 이어폰을 뺐다.
[야당은 9년 집권 여당의 부정부패를 청산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으며, 탄핵으로 정권을 잃은 여당은 불법 선거 찬탈'이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의 방패라는 세력은 야당이 집권하게 되면 '적화통일'이 될 것이라며, 촛불 집회 참가 국민을 비난하고 있죠.]
“하… 피조물 따위들이.”
사내의 중얼거림에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그를 흘끗 바라봤다. 하지만 한기 어린 눈빛과 마주치자 흠칫 놀라 다시 앞만 응시했다.
라디오는 계속 흘러나왔다.
[국민은 반성 없는 집권 여당을 질타하며, 19대 대선 결과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어폰을 다시 꽂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님, 신호등 지나고 백화점 앞에서 내려주세요.”
택시에서 내린 순간, 그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 대장 어인 일이십니까?]
전화기 너머로 밝고 명랑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 하나만 하자.”
[오..? 우리 대장이 저에게? 갑자기요? 누구 생사람 하나 담가주면 되는 겁니까?]
“헛소리 좀…”
[아아… 죄송합니다 대장.]
“그 대장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겠냐? 정이 다 떨어지려고 해.”
[하! 하! 하! 어림도 없습니다. 한 번 대장은 영원한 대장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거 같다?”
[하! 하! 하! 죄송합니다. 대장!]
“아… 정말 기 빨린다…”
[근데 무슨 부탁입니까?]
“조사 좀 해주라.”
[누구를요.]
“성령의 방패라는 세력 조사 좀 해줘.”
일순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밝은 목소리가 멎었다.
“야?”
[아… 죄송합니다. 성령의 방패요?]
“어.”
[뭐 하는 애들인데요?]
“몰라. 대통령 선거 한 달 앞두고 여당 편에 서서 설치는데 뭐 하는 애들인지 궁금해서 조사 좀 해줘.”
[아하. 네. 우리 대장님 명령이면 들어야죠.]
“그 대장 소리 좀… 진짜…”
[그럼 조만간 최대한 빠르게 뒷조사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야 인마…!!”
전화는 웃음기 어린 숨소리만 남긴 채 끊겼다.
사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저 녀석을 손봐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의 얼굴은 얼음장 같은 냉기로 굳어 있었다.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어느 카페 앞에서 멈춰 섰다.
차가웠던 눈빛이 보호색처럼 바뀌었다. 사회적 가면이 떠오르듯 따스한 생기가 스며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내가 밝은 미소로 카페에 들어서자 계산대 서 있던 아가씨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맞이한다.
"어머! 쌤!?"
[또각..!! 또각..!!]
구석에서 책을 읽던 여인이 벌떡 일어나 구둣발 소리를 울리며 다가온다.
[또각..!! 또각..!!]
늘씬한 검은 원피스 차림의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같은 여자라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빼어난 미모였다.
“잘 지내셨어요, 쌤?”
“네. 누나도 잘 지내셨어요?”
“어서 앉으세요. 차 내올게요.”
여인이 계산대로 향하는 사이, 사내는 그녀가 앉아 있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는 분주히 움직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참 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그는, 그녀가 읽고 있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표지를 확인한 뒤, 그는 자연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계산대 근처에는 커피 포트와 여러 조리기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준비했고, 카페에는 잔잔한 기계음과 함께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또각… 또각…]
사내가 책장을 몇 장 넘기던 순간,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준비를 마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각… 또각…]
여인은 짙은 붉은색 음료가 담긴 유리잔과 케이크 접시를 양손에 든 채 사내에게 다가왔다. 구두 소리가 조용한 카페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사내는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여인은 준비한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어..!?”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사내가 그녀가 준비해 온 것들을 바라보자, 여인은 맞은편에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오셔서 이야기 많이 하다가 가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서비스니까 부담 가지지 마시고 아주!! 아주!! 정말!! 정말!! 천천히 드세요!!”
강조하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사내는 살며시 웃었다.
“아… 네, 누나…”
그는 선뜻 손을 대지 못했고, 여인은 그런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글 쓰시는데 방해가 될 거 같아서 연락도 못 드렸는데. 얼굴 잊어버릴 뻔했어요. 연락도 잘 없으시고, 대체 이게 얼마 만이에요?”
불평 섞인 말투에 사내는 쥐구멍을 찾는 생쥐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죄송해요. 자주 연락드리고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사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 여인은 놀란 듯 손사래를 쳤다.
“어머!! 쌤!! 죄송하기는요!! 직장 생활하시랴 글 쓰시랴 많이 힘드실 텐데요. 이해해요.”
사내는 더욱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여인은 그런 그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얼굴 비춰주시니 반갑고 감사한 거죠. 그만큼 글 쓰시는 데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신다는 거잖아요. 저는 쌤의 그런 부분이 존경스러워요!!”
사내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존경스럽기는요. 글 쓰는 게 뭘 그리 대단한 거라고요. 제가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닌데.”
여인은 미소를 지었다.
“잘 쓰든 못 쓰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죠. 더군다나 쌤은 그 누구도 쓰지 못하는 독특하고 특이한 글을 쓰시는 분이잖아요.”
“아하하하…”
이어지는 칭찬에 사내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참 신기해요. 18대 정권 탄핵하고 무정부 2개월 올 거라고 6개월 전에 맞추셨잖아요."
사내가 당황하며 시선을 피한다.
"그냥... 운이었죠. 다들 그랬잖아요 된다 안된다 네 말이 맞다 안 맞다. 저는 어쩌다가 맞춘 거뿐이고요.."
"거짓말 무당들도 못 맞췄는데요.? 더군다나 무정부가 들어설 거라는 것을 아는 무당들도 없었어요 근데 쌤은 무정부가 들어설 거라는 것도 맞추셨잖아요? 그것도 정확하게 2달을..!!"
사내가 어깨를 으쓱한다.
"뭐 그냥 느낌이죠. 느낌."
여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쌤 같은 분을 알게 돼서 정말 기뻐요. 그리고 젊은 사람이 그런 특이하고 독특한 글을 썼다는 것도 신기하고"
사내의 눈에 그림자가 스친다.
"그냥 뭐 한 어린 소녀의 아버지로서 무기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네?"
"부모의 마음이란 거죠 뭐"
"그 마음으로 글을 쓰셨다는 게 더 대단하네요.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위해서 글을 쓰다."
여인이 사내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역시..!! 우리 쌤은 대단한 분이에요!!”
여인에게 과분한 칭찬을 듣자 사내가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대단하기는요!!! 저 아직도 출판을 한지도 6개월이 지났는데도 책이 안 팔려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쌤은 분명 뜰 거예요. 제 이름 석 자 걸고 맹세해요.”
근거 없는 확신으로 가득 한 얼굴로 웃는 여인을 보며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 말 해도 위로 1도 안됩니다. 누나."
“이거 계속 생각났는데! 감사합니다…!! 케이크도 잘 먹을게요!!”
사내가 붉은 음료가 담긴 유리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여인은 그를 말없이 바라봤다.
“드시고 부족하시면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더 드릴 수 있어요.”
사내는 유리잔 속 음료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격랑을 출판사에 넘기기 전, 여기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네요.”
여인 역시 그때가 떠올랐는지 밝게 웃었다.
“저도 기억나요. 종이 뭉치를 붙잡고 심각한 얼굴로 읽고 계셨죠.”
사내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여인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계속 보고 있으니까 괜히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사내는 잔을 내려놓았다.
“세 번째 왔을 때 누나가 이 홍차를 주셨죠. 그리고 저한테 물으셨잖아요 제가 원고를 검토할 때 그거 유언장이냐고.”
여인은 그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을 붉혔다.
"그때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요 엄청 크게 웃었는데."
“그때 얼마나 민망했는지 몰라요. 손님도 많았는데…”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해요. 그래도 웃겼는걸요.”
여인은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그때 모습이 얼마나 걱정스러웠는지 알아요?”
사내는 웃음을 멈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친해졌잖아요. 정말 감사하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처음 원고를 봤을 때… 솔직히 좀 무서웠어요.”
“왜요?”
“너무 절박해 보여서요.”
사내는 케이크를 한입 떠먹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여기까지 왔네요.”
여인은 장난스럽게 그를 불렀다.
“누나~~~~?”
“네?”
“걱정도 팔자라는 말, 들어봤어요?”
여인은 정색했고, 곧 장난기 어린 실랑이가 벌어졌다.
“정말! 어른 놀리면 못써요!”
잠시 후 여인은 팔짱을 낀 채 자리에 앉았고, 사내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웃었다.
“그래도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여인은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누나 덕분에 새로운 이야기도 쓰고 있고요.”
“그건 쌤이 쓰고 싶은 거죠.”
“그래도 설득해 준 건 누나잖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잠시 후 사내가 말했다.
“이번 작품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배경, 인물, 흐름… 설정하는 과정이 쉽진 않더라고요.”
“그래도 금방 준비하셨잖아요.”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사내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용은 비밀입니다.”
여인은 다시 눈을 흘겼고, 짧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잠시 후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 쌤을 보면 겁이 없는 사람 같다니까요.”
사내는 미소로 답했다.
“홍차도 마셨고 케이크도 맛있게 먹었고 이야기도 많이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
“벌써요? 조금 더 있다 가요.”
“다음에요.”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인은 놀란 얼굴로, 이미 자리를 털고 선 그를 올려다봤다.
“조금 있으면 회장님 오실 텐데… 얼굴 보고 가세요.”
여인의 부탁에도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시내 좀 구경하다가 들어가서 글 쓰려고요.”
“알았어요. 더 이상 잡지 않을게요, 쌤.”
강하게 거절하는 그의 모습에 여인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더는 붙잡지 않았다.
“아…!! 맞다…!! 누나…!!”
카페를 나서려던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마중 나오려던 여인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네?”
여인은 고개를 갸웃했고, 사내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밝게 미소 지었다.
문 앞에서 사내가 돌아섰다.
“전에 도와달라고 했던 거… 기억해요?”
여인은 놀란 눈으로 그를 봤다. 금세 여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대신 조건 하나 있어요. 서로 믿기.”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가볼게요. 연락할게요.”
사내는 인사를 남기고 카페를 나섰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의 표정이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하며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많은 사람들을 스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