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파악 49

2화(내용 수정)

by 가비

부드럽게 쏟아지는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이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잘 관리된 블루 컬러의 긴 생머리는 결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곧게 떨어지며, 빛을 받을 때마다 잔잔한 밤바다 같은 깊이를 드러냈다. 손길이 얼마나 세심하게 닿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정돈된 머릿결이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는 조명 속에서 차분히 빛났다. 도자기처럼 균일한 피부 위로 미세한 표정 변화조차 또렷하게 살아났고, 푸른 머리칼과 대비되며 그녀의 인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손톱 파일을 움직이고 있었다.

[사각… 사각…]

행여라도 방향을 잘못 잡아 손을 다칠까, 움직임 하나하나가 유난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손끝에는 불필요한 힘이 실리지 않았고, 오로지 정확함만이 남아 있었다.

[사각… 사각…]

규칙적인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갓 다듬은 손끝을 들어 올려 각도를 살피는 눈빛에는 묘한 긴장이 담겨 있었다. 작은 흠 하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그때, 테이블 한쪽에 엎어 둔 휴대전화가 낮게 진동했다.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진동은 한 번,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이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전화기로 내려앉았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얘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특별한 일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핸드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놀람도 반가움도 아닌, 얇게 번지는 불안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손톱에 남은 가루를 가볍게 털어낸 뒤, 그녀는 한 박자 늦게 전화를 집어 들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광택이 손끝에서 은은히 반짝였다.

“무슨 일이니?”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밑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두목, 오랜만입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일이라 전화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두목이 벤치마킹하라고 했던 그 남자 일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말해. 무슨 일인데?”

[그 남자가 성령의 방패에 대한 뒷조사를 요구했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래?”

[네. 두목, 어떻게 할까요?]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창밖으로 향했다.

“그 인간이… 성령의 방패의 뒷조사를 요청 했단 말이지?”

[네. 제 선에서 그냥 종교 세력이라 신경 안 써도 된다고 정리할까 했는데… 일단 두목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방 안의 공기는 침묵과 함께 천천히 가라앉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젊은 청년의 숨결을 들으며, 그녀의 시선은 창밖 어딘가에 고정돼 있었다. 마치 이런 통화를 이미 예감이라도 한 듯, 눈빛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고요가 길어질수록 공기의 결이 미세하게 변했다. 방금 전까지의 평온함이 스산한 긴장으로 바뀌며, 공간 전체를 서서히 잠식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자신이 내릴 결정 하나가 수많은 결과를 불러올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숨조차 조심스러웠다. 마치 그 선택에 여러 목숨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 그녀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고요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는 계산과 판단이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허용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그녀는 그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결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선택과 결정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기 위하여 굳게 깨문 입술을 중얼 거린다.

“… 다 넘겨.”

[네?]

“자료 전부. 하나도 빼지 말고.”

[진심입니까?]

“어차피 그 인간과 성령의 방패는 언젠가 부딪힌다.”

잠깐의 정적.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상대를 알아야 이길 방법도 보이니까.”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혹시 열사라도 되거나… 암살자가 되면…]

“웃기려고 어디 학원이라도 다니니?”

[하하… 죄송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고아였던 널 우리 아버지가 거둔 이유는 하나야. 네 가치 때문이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덕분에 넌 세계 최고 수준의 사이버 공격 능력을 갖췄지.”

[함부로 쓰지 않겠습니다.]

“그래.”

잠시 후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지금 한국에서 성령의 방패는 곧 한국이야 한국이 곧 성령의 방패고..”

[맞습니다.]

“하지만 그 힘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넘기라는 거군요.]

“그래. 전부.”

“원래 성령의 방패는 처음 생겨났을 때는 지금과는 다른 색깔이었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알고 있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짧았지만, 조심스러웠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역사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1차와 2차 세계 대전을 겪고 6·25 사변을 연이어 겪으면서 이 세상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어.”

그녀의 말투가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먹을 게 없고, 잘 곳도 없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붙들고 만든 게 시작이었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처음엔 거창한 이념도 없었어. 그냥… 버티기 위한 약속 같은 거였지.”

[서로 돕기 위한 공동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 가진 걸 나누고, 사람을 숨기고, 아이를 먹이고… 그런 것들이었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리듬은 일정했지만,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짧은 침묵.

“사람이 모이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욕심이 따라붙는 법이야.그 욕심은 욕망과 야망을 낳게 되지.”

전화기 너머에서 숨소리가 작게 멎었다.

“처음엔 생존이 목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영향력이 목적이 됐지. 그게 점점 세력이 커지더니… 지금의 성령의 방패라는 거대한 세력이 되어버린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

[겉으로는 종교 단체… 실상은 정치·자금·정보망까지 연결된 조직.]

“겉모습은 늘 깨끗하지.”

그녀가 낮게 웃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의심을 안 하거든.”

잠깐의 정적.

“문제는…”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자기들이 어디까지 커졌는지… 그들 자신도 모른다는 거야.”

[통제 불가능한 구조라는 말씀이십니까?]

“통제는 오래전에 불가능 해졌지.”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목적과 목표만 남았지.”

[하지만, 그들의 목적과 목표를 모르겠습니다.]

방 안의 정적이 다시 짙어졌다.

“그래서 더 위험해.”

그녀의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목적과 목표를 잃어버린 힘은… 사람을 넘어서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짧은 숨이 들렸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정보를 넘기라고 하는 건가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 그래.”

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

“누군가는 판을 흔들어야 하니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했습니다.]

짧은 침묵 뒤.

“그리고 그 ‘두목’ 소리… 그만 못 하겠니?”

[죄송합니다, 두목! 하하!]

그녀는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방 안의 긴장이 아주 조금 풀렸다.

[두목을 보고 있으면 김만덕이라는 여성이 떠오릅니다]

"얘가 미쳤나 무슨 헛소리니"

[그 있잖아요. 제주도가 크게 흉년이 들었을 때 자기 재산 다 털어서 제주도사람들 먹여 살린 여성]

"나보고 그 짓하라는 거니?"

[하하!! 설마요. 김만덕은 제주도민만 먹여 살렸지만, 우리 두목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게 될 여자가 될 거 같으니까요!]

"얘가 정말 점점 헛소리를 하네? 혼날래? 조만간 카즈마 보내서 목이라도 따라고 해야겠다"

[윽...]

여성의 입에서 카즈마라는 이름이 나오자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청년의 밝은 목소리에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영감님은 정말 싫은데요?]

"넌 왜 그렇게 카즈마를 싫어하니?"

[겉은 잘생긴 능구렁이 같지만, 속은 냉혹한 야수 같거든요 눈 돌아가면 사람 목하나 즘 뽑아내는 건 장난감 망가트리는 거보다 쉬울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잘생긴 능구렁이는 뭐니."

여성이 미소를 지었다.

"하긴 카즈마가 그런 게 좀 있기는 하지."

[정말 자다가도 꿈에서 카즈마 영감님이 나타나면 경기를 일으킨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카즈마가 그 정도는 아닌데? 담력 좀 키워주러 어디 멀리 비공식 군사 전투 훈련이나 받으러 보내야겠다."

[차라리 입에 칼을 물고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농담이야. 정말 그런 일 생기면 나한테도 손해고 한국의 안보에도 손해니."

[두목도 연락 안 하는 사이 유머 감각이 느셨네요. 하!! 하!! 하!!]

"그럼 뒷일 잘 부탁해"

[알겠습니다. 두목.]

짧은 웃음소리가 끊기자, 남은 건 정적뿐이었다.

여성은 천천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통화가 끝나자 방 안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 이제, 시작이군.”

낮게 흘러나온 독백이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바깥에서는 석양의 빛이 점점 붉게 번지며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 빛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톱 파일을 집어 들었다.

[사각… 사각…]

멈췄던 그녀의 손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하고 일정한 리듬이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는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압박이 내려앉은 듯, 숨결조차 조심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손톱 위로 파일을 미끄러뜨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결국 운명은… 또다시 그를 전쟁터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구나.”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참 재미있지… 운명이라는 건.”

[사각.. 사각..]

작은 마찰음이 다시 방을 채웠다.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이미 시작된 이야기가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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