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파악 51

4화

by 가비

[다음 정차할 역은 서면, 서면입니다.]

갖가지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 안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시작했고,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사내 역시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터널을 달리던 열차가 서서히 빛 속으로 빠져나왔다. 창밖으로 승강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곧 속도를 줄인 열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푸쉬]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사내는 그 흐름에 섞여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새 신을 신은 아이처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능숙하게 지나며 그는 지하도를 가로질렀다.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계단 앞에 멈춰 선 순간.

[띵동!]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쌤!! 어디예요!?]

검은색 옷은 입고 있는 사내는 답장을 입력했다.

[거의 다 왔어요. 5분 안으로 도착할 것 같아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그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씩 올라갈수록 지상의 공기가 가까워졌다. 마침내 밖으로 나온 그는 숨을 고르며 계단을 돌아봤다.

“휴우… 이제 늙었다고 계단 오르는 것도 만만치 않네.”

그는 혼잣말을 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지나온 세월을 겪은 것에 대한 아픔 때문일까? 아니면 짊어진 삶의 무게 탓일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감정을 지운 채 차갑게 굳어 있었다.

도착한 곳은 익숙한 카페 앞이었다. 그는 이어폰을 빼 주머니에 넣은 뒤 문을 밀었다.

[딸랑.]

문이 열리면서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안녕하세요?”

카운터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 여성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때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옮기던 여인이 사내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어머, 쌤! 어서 와요!”

사내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는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와… 그걸 다 준비하신 거예요?”

“네. 제가 직접 시장 보고 했어요.”

사내는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대박이네요…”

여인이 웃으며 손짓했다.

“감탄은 그만하고 어서 오세요.”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스님은 어디 가셨어요?”

“회장님은 다음 달에 행사가 잡히셔서 회의하러 가셨어요.”

“행사요?”

“아는 절에서 부탁이 들어왔거든요. 장구 좀 쳐달라고.”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누나도 가는 거죠? 시간 맞으면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요.”

여인은 웃으며 음식을 더 내려놓았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이야기는 천천히 하죠.”

따뜻한 공기와 음식 냄새 속에서 그는 자리에 앉았다.

“와… 진짜 대박. 누나 요리 잘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회장님이 그런 말을 했어요?”

그는 웃으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었다.

“스님이 누나 솜씨는 한국 최고라고 하시던데요.”

“회장님도 참, 그런 과장을…”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거짓말 같진 않은데요?”

“어머, 쌤도 참.”

그는 여인의 정성에 보답하듯 숟가락과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접시는 빠르게 비어갔다.

“잘 먹는 모습 보니까 좋네요.”

“정말 맛있어요. 누나는 안 드세요?”

“전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먹어서 괜찮아요.”

그는 작게 웃었다.

“글은 잘 써지고 있어요?”

“그냥… 열심히 쓰는 거죠. 되든 안 되든.”

“잘됐으면 좋겠어요. 쌤 잘되는 모습 꼭 보고 싶거든요.”

그는 잠시 웃음을 지었다.

“저도 그러길 바라요. 첫 작품이 조용해서 좀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쌤은 분명 잘될 거예요. 언젠가는 인정받을 거고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누나.”

그는 빈 그릇을 정리하며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벌써 다 드셨어요? 역시 남자들은 다르네요.”

“기대가 커서 어제저녁부터 굶었거든요.”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도 참.”

그는 말없이 그릇을 들었다.

“어머,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이렇게 대접도 받았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처세는 잘 배우셨네요.”

그는 웃으며 답했다.

“기브 앤 테이크는 중요하니까요.”

여인은 말없이 사내가 빈 그릇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내는 신속하게 빈그릇들을 정리한 뒤 음식 물들이 떨어져 있는 테이블 위를 닦기 시작한다.

"고생하셨어요 쌤."

"잘 먹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그리고 제 생일 선물로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누다"

"다음에 드시고 싶으면 또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매일도 가능한가요?"

"쌤 정말..."

"하하..."

"그 공연은 뭐예요?"

"어쩌다 보니 참가하게 된 거라 준비할 것도 많고 해서 회장님도 저도 고생이 많네요."

"저도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으면 거들어 드러요?"

"아니에요. 쌤."

"그것보다 다음 주 시간 있으세요?"

"다음 주요?"

"네 저 다음 주에 개고기 반대 운동 하거든요 부산 구포 시장에서."

"아 구포 시장에 전국에서 가장 큰 개고기 시장이 있기는 하죠."

"같이 가주세요."

"네. 누나 저도 가서 응원해 드릴게요."

"정말 같이 가주시는 거죠? 당일날에 잠수 타고 그러시면 안돼요?"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감사해요."

"근데 그거 진짜예요?"

"뭐가요?"

"제 도움을 얻고 싶다고 했던 거요."

"아아.. 그럼요. 기억나세요? 처음 여기 카페 오셔서 쌤이 혼자서 원고 보신 거 그것도 3번이나."

"한창 재밌는 영화도 개봉을 많이 하던 때라 상영 시간까지 시간도 남고 해서 고르고 골라서 들어온 곳이 누가 카페였죠."

"전 또 특이한 게 한번 와보고 맘에 들면 계속 가게 되는 성격이거든요. 아늑하고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셨군요."

"그러다가 누나가 붉은 홍차를 내어 주시면서 관심을 보이셨고. 그렇게 제 원고 보시고 피드백도 주시고. 도움 많이 되었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때 쌤 원고 보면서 많이 생각했거든요."

"뭐가요?"

"이 사람은 정말 이 나라를 이 세상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사내는 말없이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 쌤의 원고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만약 나중에 내가 정말 운이 좋아서 대통령이 된다면 이 사람을 쓰면 좋겠다라고."

"하하.. 오버입니다."

"아뇨 저는 진심이에요."

"저는 그냥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글쟁이일 뿐입니다 누나."

"저는 쌤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아요. 쌤의 글에서는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요."

여인은 멈추지 않고 사내를 더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마치 그 모습은 자신이 삼은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맹수와 같았다.

"언젠가 나의 글로 이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그런 야망을 봤어요."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데. 그는 이 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계산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도 쌤을 도와드리고 싶어요."

"제가 권력을 가지면 쌤을 도와드릴게요 그러니 쌤도 저를 도와주세요."

"조건은 서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저도 알아요 쌤 답답하겠죠. 그렇게 좋은 글이 어느 순간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알려지지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러니 저를 도와주세요.

"이해가 가지 않네요."

"뭐가요?"

"굳이 왜 이런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 하시는지. 그리고 저 같은 알려지지도 못하고 있는 삼류 글쟁이한테 도움을 청하시는지."

"쌤..?"

"제가 그러한 글을 쓴 건 이 나라를 사랑해서도 아니고 이 세상을 사랑해서도 아닙니다."

"그냥 딸의 미래를 위해서였어요 지금 보다 밝은 세상에서 권력층과 기득권자들의 먹잇감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게 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쌤..."

"그거 아세요? 지금 이 순간도 인간이라는 피조물들은 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죽이고 있다는 거."

"...."

"제 딸은. 그리고 제 딸과 함께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세상만큼은 되지 않게 만들고 싶었어요."

"....."

"누나"

"네. 쌤."

"누나의 조건 받아들이겠습니다."

"쌤,,,"

여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서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그 조건 지키셔야 할 겁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쌤."

"이제 가볼게요 오늘 감사했어요 누나 음식도 맛있었고 누나의 마음 잘 받았습니다."

"아니에요. 언제라도 말씀하시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여인은 사내를 배웅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가 카페를 나서기 위하여 걸음 옮기자 여인이 그를 배웅하며 따라나선다.

"그럼 누나. 다음 주에 봐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아니에요 쌤 그럼 담주에 봐요."

사내가 카페를 벗어난다. 사내의 그런 뒷모습을 말없이 보던 여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희미하게 번진다.

[띵동!]

사내가 카페를 벗어 난 직후였다. 나의 핸드폰에 문자가 온 것을 알린다. 그리고 사내는 문자를 확인한다.

[대장. 내일 감천항 부두에서 봅시다.]

문자를 확인한 직후 사내는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의 미소은 어느새 차갑게 얼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향해 걸음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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