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바닷바람이 거칠게 불어오는 감청항 부둣길.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 번쩍이는 스포츠카 한 대가 옆으로 미끄러지듯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
혼자 부둣길을 걷던 사내는 힐끗 차를 확인하며 걸음을 멈췄다. 햇살을 받은 붉은 차체가 반짝인다. 엔진 소리가 낮게 울리다 잦아들고,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가기 시작한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성은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사내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장난기가 담긴 미소였다. 훤칠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 짧은 머리. 탄력 있는 근육과 건장한 체구.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다가와 사랑을 속삭일 수밖에 없는 미남이었다.
보조석에 앉은 사내가 차체를 쓰다듬으며 손끝으로 차의 질감을 느낀다.
“차 좋다?”
운전자가 피식 웃는다.
“귀하신 분 모시려고 아는 누나한테 빌렸습니다.”
사내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투를 살짝 높였다.
“이야, 부럽네. 잘생기면 이런 차도 막 빌리고… 나도 유전자 좋은 부모 만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젊은 남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거 제가 들어도 좀 아픈데요.”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를 낮췄다.
“뭐 인마? 아무리 그래도 내 부모를 네가 욕해도 되냐?”
젊은 남성이 급히 손을 저으며 웃음을 억눌렀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사내는 다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턱을 쓰다듬었다.
“잘생겼다고 누나들이 가만있어도 잘 챙겨줬나 보다. 얼굴 피부가 좋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대장님도 그렇게 눈 뜨고 못 볼 정도는 아닌데요?”
“하지만 너처럼 비싼 차를 빌릴 만큼은 아니지.”
젊은 남성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건 저도 마음이 아프네요.”
“야…”
젊은 남성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장.”
바닷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며들었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부둣길에 놓인 크레인, 부두 상판의 녹슨 철제 기둥들이 바닷바람을 맞는다.
찾아온 짧은 침묵을 깨고 젊은 남성이 몸을 돌린다.
"아 참"
그는 뒤에 있는 조수석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두툼한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젊은 남성이 집어든 종이 뭉치는 두툼했으며 묵직해 보였다.
“이거 받으시죠.”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했다. 종이 뭉치는 예상보다 무거웠다. 적어도 백 페이지는 넘어 보였다.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사내는 종이 뭉치를 받아 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성령의 방패 뒷조사를 요구했지, 논문은 원한 적 없는데?”
젊은 남성은 담배를 입에 물며 천천히 대답했다.
“대장님이 요구한 성령의 방패 자료입니다. 이것저것 긁다 보니, 논문급 자료가 만들어지더라고요. 단순 정리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해, 거의 보고서 수준으로 작성했습니다.”
보조석에 앉은 사내는 자료를 들고, 펼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무게감이 심상치 않았다. 단순한 정보 수준을 넘어, 숨겨진 힘과 위협이 느껴졌다.
“성령의 방패, 세력도 어지간한가 보다?”
젊은 남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느낀 압도적인 위력에 대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성령의 방패 관련 모든 정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인물, 기업, 세력, 자금 흐름까지. 조사하다 보니 어마어마하더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 섞인 말투가 없었다. 진지함과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옆 좌석에 앉은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고, 종이 뭉치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붉은 스포츠카 안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엔진 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바닷바람과 섞였다. 창문 사이로 스며든 짠내가 코끝을 스치고, 멀리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한 번 더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 부두 위 철제 구조물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처럼, 차 안 분위기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옆좌석 사내는 천천히 종이 뭉치의 첫 장을 펼쳤다. 한 손으로 잡은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전해지는 듯했다.
운전석의 젊은 남성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불꽃이 잠깐 타오른 뒤 사라지고, 담배 끝이 붉게 물들었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가 차창 밖으로 흘러 바람 속으로 섞였다. 흩어지는 연기와 함께 긴장감이 차 안에 은밀히 퍼졌다.
“정말 어마어마하군.”
“맞습니다, 대장.”
“처음에는 종교였지만, 이제는 국가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견제할 세력이 없다 보니, 그들의 폭주는 목표와 목적조차 잃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이따위로 되어버렸지.”
“문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넘어버렸다는 것이죠.”
“하기사. 나라 꼬락서니를 보면 이념 전쟁, 세대 전쟁, 종교 전쟁, 성별 전쟁, 학력 전쟁… 아, 머리 아프다. 이 중심에 성령의 방패가 있다고 생각하니 진절머리가 난다.”
자료를 넘겨보던 사내의 미간이 꿈틀 거린다. 그는 차마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자신의 시선을 자리 잡은 페이지에 보이는 인물들의 사진에 시선을 멈추었다.
“근데 이 사람들도 성령의 방패 세력이었나?”
사내의 얼굴에는 어느새 배신감이 깊게 파고들었다.
“네? 뭐 아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도 있네?”
사내는 한 손으로 종이를 움켜쥔 채 창밖을 바라봤다. 붉은 노을과 바다, 항구의 크레인과 녹슨 구조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배신감이 짙게 자리 잡았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나라를 살리려 고생했는데, 가난을 겪은 그 후손들은 종교라는 것을 이용해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비친 분노는 깊고 무거웠다.
“안타깝지만, 어쩌겠습니까.”
운전석의 젊은 남성이 사내를 위로하듯 말했다.
“가난의 노예가 되어버린 저들이 권력과 기득권을 잡고 있는 한, 이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장.”
“물론 저들의 시대가 끝났을 때에는, 이 나라는 어쩌면 그 흔적조차 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차창 밖을 말없이 바라보는 사내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골치 아프다. 어떻게 해야겠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 때려 부숴버릴까?”
운전석에 앉은 젊은 남성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좋은 방법 같습니다, 대장님.”
“역시 넘겨야 하나?”
“네? 무슨 말입니까, 대장님?”
“아냐, 그냥 혼자 쓸 때 없는 소리”
"아. 네."
"참 인간이라는 피조물들은 대단해 쉬지도 않고 분쟁을 이르지 안 지치나 봐?"
사내는 차창 노을을 보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는데도 질리지도 않고 더 즐거운가 봐? 마치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살인을 하지 않으면 미래라는 것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처럼"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말을 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괴로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드러나 있는 얼굴로 그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좀 서로 팔짱 끼고 어깨 동무하고 밝게 웃으면서 내 친 형제 부모처럼 그렇게 잘 살 수는 없을까?"
"그거. 너무 유토피아적 망상 아닙니까? 대장?"
"그렇지?"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망상."
"뭐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종이 뭉치를 뒷 좌석으로 던지듯 내려놓는다.
"안 가져가시고요?"
"가지고 있어 봐야. 마음에 병만 생길 거 같아"
"그럼 제가 가지고 있을 테니 필요할 때 말씀하세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말없이 차 문을 열기 시작한다.
"오늘 고마웠다"
"왜요? 태워드릴게요?"
"아냐 답답한데 걸어갈래 바닷바람이 시원하다야."
"대장님도 그 나이 먹고 낭만질입니까?"
"뭐 인마?"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대장님."
"그래. 안전 운전하고 조심히 들어가라."
"대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마치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 젊은 남성은 붉은 스포츠카의 액셀을 밟았다.
[부안 아아아 앙…!!]
이미 시야에서 멀어진 붉은 스포츠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는 말없이 웃었다.
“그래도… 이런 낭만은 아직 괜찮지.”
바닷바람이 흩날리고, 감천항 부두에 놓인 구조물들과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그는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감천항을 홀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