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여인과 구포 시장에서 반대 운동을 시작하는 사이.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대형 카페.
카페 유리창 너머로 해운대의 오후 햇살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숏 단발의 여성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한 생각을 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두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그녀가 마음속으로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숏 단발의 여성이 고개를 돌렸다.
햇살을 등지고 한 여성이 걸어 들어왔다. 긴 푸른빛 머리칼이 빛을 받아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를 보자 숏 단발 여성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졌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언니, 여기에요.”
긴 머리 여성이 다가오며 웃었다.
“야, 또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지?”
숏 단발 여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그 말만 몇 년째 듣는 것 같은데? 5년 동안 너보다 빨리 와서 기다려 본 적이 없는데?”
둘이 동시에 웃었다. 익숙한 시작이었다.
긴 머리 여성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너무 좋다. 햇빛 진짜 예쁘다.”
숏 단발 여성도 창밖을 흘깃 봤다.
“그러네요.”
잠깐의 침묵. 어색해서가 아니라, 서로 편안해서 생긴 자연스러운 정적이었다.
긴 머리 여성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시간 진짜 빠르다.”
숏 단발 여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5년이야. 5년. 벌써 이렇게나 지나버렸어.”
둘이 동시에 웃었다.
“그러니까요, 정말 말도 안 돼요.”
“처음 너를 만날 때 정말 많이 예뻤는데.”
“어머, 언니 지금은 안 예쁘다는 거예요?”
“아니지 얘. 이제 물이 올랐다는 말이지.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만 가면 되겠다.”
“그건”
말끝을 흐리는 숏 단발 여성에게 긴 생머리 여성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 소개해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단발의 여성은 놀란 얼굴로 긴 생머리 여성을 바라봤다.
“아뇨 아뇨.”
“부끄러워하긴 언제든 남자 필요하면 말해. 능력 있고, 잘생기고, 다정다감한 남자 얼마든지 있으니까.”
“알겠어요, 언니.”
숏 단발 여성의 시선이 잔 속으로 떨어졌다.
“이제 끝인가요?”
“아쉽니?”
“네”
긴 머리 여성이 힐끗 그녀를 보았다.
“솔직히 힘들었지?”
윤하영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가 피식 웃었다.
“조금요?”
“정말 조금이야?”
“알았어요, 언니. 솔직히 많이 힘들었어요.”
둘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긴 머리 여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잘 버텨줘서 고맙네. 미안하기도 하고.”
“뭐, 계약이니까요. 언니가 중간중간 많이 도와주기도 하셨고요.”
그 말에 긴 머리 여성의 표정이 잠깐 부드러워졌다.
“야”
짧은 한 마디였지만,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잠시 후 말을 이어갔다.
“이제 우리도 여기서 정리하고 좀 쉬자.”
윤하영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
“정말 끝이에요?”
“응.”
아쉬움이 남은 이별 선언이었다.
“우리 할 거 다 했잖아. 너도 5년 동안 그 인간 출판할 때까지 옆에서 교정·교열 도와주고, 계약도 끝났고.”
윤하영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허무하다”
“그렇지? 원래 끝은 다 그렇잖니.”
“그래도 아쉬워요”
둘이 마주 보고 웃었다.
“진짜 고생했어.”
“언니도요.”
긴 머리 여성이 미소를 지었다. 윤하영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요? 다른 글도 준비 중이던데.”
순간, 긴 생머리 여성의 미간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그 사람 곁에 조금 더 있으면 안 될까?”
순식간에 화기애애했던 공기가 무겁게 변했다. 긴 생머리 여성의 얼굴에 불편한 감정이 드러났다.
“분명 계약 중에 연애 감정은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던 거 같은데?”
“윤하영?”
긴 생머리 여성은 하영이의 기를 살짝 눌러 이름을 불렀다.
“네, 언니.”
긴 머리 여성의 기운에 눌린 탓일까, 윤하영의 대답은 낮고 작았다.
“하영아, 그냥 계약 전처럼 다시 돌아가는 거야.”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윤하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영아?”
“아 네네, 언니.”
“우리 계약은 네가 그 사람에게 접근해서 그 사람이 쓰고 있는 글을 출판할 때까지 교정·교열하는 거였어. 그러면 내가 가진 힘으로 너의 아버지를 정치의 거물로 만들어주는 거였고.”
“네, 기억하고 있어요, 언니.”
윤하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긴 생머리 여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리 자리 좀 옮기자.”
의자가 낮게 긁히는 소리가 나고, 주변 테이블에서 잠깐 시선이 스쳤다가 다시 돌아갔다.
윤하영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언니?”
“여긴 사람 많아. 목소리 커질 거 같으니 따라 나와.”
윤하영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마지못해 긴 머리 여성 뒤를 따랐다.
인적 드문 장소에 도착하자, 긴 머리 여성은 낮은 톤으로 말했다.
“하영아.”
화 내기 직전이 아닌, 정리하려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윤하영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죄송해요.”
“사과할 일은 아니야. 근데 선은 지켜야지.”
윤하영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는 그냥”
“조금만 더 옆에 있고 싶었어요.”
긴 머리 여성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직접 듣는 건 다른 문제였다.
“하영아. 그게 왜 안 되는지는 너도 알잖아.”
"그리고 그 사람이 만약 딸 때문에 전처한테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건데?"
윤하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알아요.”
“이미 계약도 끝났고. 네가 여기서 개인감정 가지면 너만 다쳐.”
“저도 알아요.”
한 발 다가온 긴 머리 여성.
“그럼 끝내.”
짧지만 단호한 말. 윤하영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몇 초의 침묵.
“어차피 그 사람 글 더 이상 알려지지도 못해.”
윤하영의 두 눈이 크게 떴다.
“권력이 개입했어. 그리고 내가 그 권력이야.”
“그럼 지금까지 했던 모든 노력이 의미가 없잖아요, 언니?”
긴 머리 여성은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가 올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너 덕분에 원고는 출판까지 되었잖아. 교정, 교열, 편집까지 너 정말 수고 많았어.”
윤하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긴 머리 여성의 눈빛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내가 살짝 힘을 썼거든. 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걸 막았어. 일부러. 알잖아? 그 사람 글이 너무 퍼지면, 원치 않는 일도 생길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지금 정권에 방해라도 되면 큰일이니까.”
윤하영은 시선을 떨구었다. 묻고 싶지만, 묻지 못했다.
“그래도 출판까지 다 했는데”
“그래도 너 아버지가 정치인으로 성공하게 되는 계약은 변하지 않아. 걱정 마.”
윤하영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언니”
“계속 고집부리면, 그 계약조차 다 무산시켜 버릴 거야. 알겠지?”
“네, 언니.”
긴 머리 여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생했어. 그 사람과는 이제 그만 정리하고 헤어져.”
“네, 언니.”
드디어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의 종지부에 마침표가 찍힌 듯했다. 더 이상 어떠한 언쟁도,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긴 머리 여성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윤하영을 홀로 남겨둔 채 발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겨진 윤하영은 마음속 허전함과 혼란을 혼자 견디며, 어쩌면 스스로에게조차 답을 내릴 수 없는 고뇌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혼자 고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