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파악 61

10화

by 가비

“서면 롯데백화점이요.”

택시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사내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위로 도시의 오후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벌써 덥지요?”

기사의 말이 조심스럽게 건너왔다.

“그러네요. 4월인데도 이 정도면 여름이 걱정입니다.”

“비라도 자주 오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 안에는 에어컨 바람 소리만 은은하게 맴돌았다.

택시 기사가 말을 꺼냈다.

“요즘 생수 가격이 꽤 비싸더군요. 일본에 가도 큰 차이가 없고요. 기본적인 물건인데 부담이 됩니다.”

“물가가 많이 올랐죠.”

“저축만으로는 자산을 늘리기 어렵다고들 하니까, 다들 부동산으로 몰리는 것 같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제 구조가 쉽게 바뀌지는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죠.”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로 옮겨갔다.

“과거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지만, 각자의 시대적 선택은 있었겠지요.”

“맞습니다. 공과는 시간이 판단할 겁니다.”

사내는 낮게 웃었다.

“그 이름들이 아직도 자주 언급되는 걸 보면, 상징성이 크다는 뜻이겠죠.”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문제는 그 이름을 빌려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겠지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이라거나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라거나.”

기사가 백미러로 그를 흘끗 바라봤다.

“그럴 수도 있겠죠.”

“이미 세상을 떠난 지도자들의 이름을 내세워 국민들을 선동해서 편을 가르고 선거에 이용하고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지죠.”

기사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정치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말이 많습니다.”

“경제가 어려워도, 국민이 힘들어도 결국은 다음 선거 이야기뿐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층 아파트들이 창을 따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갔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느낌입니다. 이름만 바뀌고, 구호만 달라질 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시대가 달라도 고민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경제를 말하고, 누군가는 안보를 말하고.”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렇게 선거는 시기는 다시 오고 선거가 끝나고 시간은 흐르죠.”

기사는 더 묻지 않았다.

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저기서 세워 주세요.”

결제를 마치자 기사가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수고하세요.”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자 택시는 다시 도로 위를 달린다.

또다시 많은 인파를 지나며 목적지 앞에 선 사내는 쉽사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제까지는 다른 사람과 함께 웃고 떠들던 그였지만, 지금의 그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무거운 얼굴로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멍하니 유리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다.

발길을 돌리려다 멈추고, 다시 돌아섰다가 또다시 망설이는 모습은 갈피를 잡지 못한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그의 내면에서 무엇이 옳은지조차 정하지 못한 채, 두 개의 목소리가 조용히 다투고 있는 듯했다.

“후... 우..”

길게 숨을 내쉰 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생존을 위해 순간적으로 몸빛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표정을 고쳐 썼다. 조금 전까지의 망설임은 지운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반쯤 열려 있는 출입문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딸랑, 딸랑.]

사내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문에 매달린 방울이 가볍게 울렸다.

카페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인을 향해 웃었다.

“누나, 책 읽고 계셨네요?”

여인은 책장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왠지 오늘 오실 것 같았어요. 앉으세요.”

사내는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연한 붉은빛 차가 은은히 흔들렸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네. 누나 덕분에 무사히 잘 들어갔어요.”

그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책을 가리켰다.

“무슨 책이에요?”

“지인 자서전이에요.”

“잠깐 봐도 될까요?”

여인은 선뜻 책을 건넸다. 사내는 몇 장을 넘기다 조용히 덮었다.

“젊을 때부터 파란만장하셨네요. 존경스럽네요.”

“그 선생님,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셨죠. 그래도 남 탓 안 하시고 묵묵히 사셨어요. 그래서 더 존경받는 거고요.”

사내는 잔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저도 격랑 이후의 8년을 자서전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누나가 제안한 글 준비하느라 신경을 못 쓰고 있네요.”

여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지금 제 탓하시는 건가요?”

“아뇨, 전혀요.”

그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가치 있으니까 붙잡고 있는 거죠. 아니었으면 벌써 자서전 쓰고 있었을 거예요.”

여인의 표정이 풀어졌다.

“쌤은 잘 되실 거예요.”

“위로는 안 되네요. 격랑은 아직도 조용해요.”

“언젠가는 가치를 알아보고 알려지겠죠 너무 걱정 마세요. 자서전은 나중에 써도 늦지 않아요. 연륜이 더 쌓이면 더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사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누나 말 듣는 게 낫겠죠.”

여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내는 한동안 잔 속 붉은 물결을 내려다보았다.

“참 신기하지 않나요?”

“네, 뭐가요?”

“지금 누나와 제가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이 순간은 참 평온하잖아요.”

“네. 그렇죠.”

사내의 시선이 천천히 창밖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 시간에도 다른 어디에선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어요.”

“쌤....”

“적어도 그런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고 싶어서, 무기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썼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사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가 생각보다 멀더라고요.”

“멀죠. 그래도 완전히 포기해 버리면,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안 남아요.”

“누나는 아직 제가 그런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 쌤이 아니면 누가 써요.”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를 주고받았다.

“1년이네요. 누나랑 이렇게 인연을 이어온 것도.”

“그러게요. 생각보다 길었네요.”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쌤도 저도 이제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겠죠.”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죄송해요, 누나.”

“아니에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미 많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사내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한 마음을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성령의 방패와는 손을 잡을 수는 없어요. 누나 때문이라도 두 눈 질끈 감고 한 번 믿어볼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역시 안 되겠어요.”

여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사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부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서 불공평한 모든 것들을 바로 잡아주세요. 멀리서 응원할게요.”

여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저도 쌤을 응원할게요.”

사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누나.”

“아니에요. 저도 쌤과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도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주고받은 뒤 사내는 걸음을 옮긴다.

여인은 사내를 잡지 않았다.

[딸랑, 딸랑.]

문이 닫히며 방울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내도 돌아보지 않았다.

카페 앞 보도는 여전히 분주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전화를 붙든 채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신호등이 바뀌자 인파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사내는 그 흐름 속으로 조용히 몸을 섞었다.

사내가 입고 있는 검은 옷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다만 멈추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마주 앉아 있던 테이블, 붉은빛 차, 그리고 그 연에 대한 기억도 이미 도시의 소음 속으로 잊혀간다.

고개를 들자 회색 빌딩들이 하늘을 잘게 잘라 놓은 듯 서 있었다. 유리창에는 오후 햇빛이 번쩍였고, 그 사이로 그의 모습이 순간순간 비쳤다가 사라졌다. 사내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결심을 한 사람의 얼굴 같기도, 무언가를 두고 온 사람의 얼굴 같기도 했다. 마치 목적지를 잃고 떠도는 방랑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인파 속에서 그는 또 한 명의 인파일뿐이었다. 그저 수많은 검은 점 중 하나처럼, 도시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걸음을 쉬지 않고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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