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파악 62

11화

by 가비

7화에서 1주일 뒤.

인천공항.

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해가 중천에서 저물어 간다.

윤하영은 인천공항 출국장의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지나치게 차분한 표정. 무릎 위에는 작은 가방이 올려져 있었고, 손에는 방금 발권한 비행기 표가 구겨질 듯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그녀 옆에는 또 다른 여성이 앉아 있었다. 깔끔하게 바른 립스틱, 빈틈없는 자세,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동자. 윤하영의 아버지와 관련된 문제로 계약을 맺었던, 비밀이 많은 그 여성이었다.

윤하영은 손에 쥔 비행기 표를 바라보았다. 그 표를 응시하는 두 눈과 얼굴에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하는 순수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오빠한테 전화 한 통만 해도 될까요?”

윤하영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낮은 목소리로 부탁하듯 말했다.

“미련만 더 깊어질 텐데, 괜찮겠어?”

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영이는 말없이 자신의 비행기 표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그래도 이렇게 말없이 가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윤하영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비행기 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윤하영의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하고 나서, 평생 안고 갈 미련과 후회를 감당할 수 있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멀리서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행히도 윤하영의 차례는 아니었다. 하영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라는 판단인 듯했다.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시간은 그녀의 선택과 결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고운 손을 바삐 움직이며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휴대전화를 통해 전화를 거는 동안 과거를 회상했다.

-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계약을 맺은 지 사흘째 되던 저녁.

하영은 일부러 그가 자주 간다는 작은 서점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얼마나 서성이고 있었을까? 서점의 문이 열리며 그가 나왔다.

책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이어폰을 낀 채 무심한 얼굴로 서점을 걸어 나온 그 남자였다.

하영은 숨을 한번 고르고, 먼저 다가갔다.

“저기요.”

그가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들었다.

“네?”

“혹시 그 책 재미있어요?”

그는 잠시 책 표지를 내려다봤다.

“그냥 에세이인데요. 왜요?”

“저도 그거 살까 고민 중이어서요.”

사실 고민 따위 하지 않았다. 그가 뭘 읽는지도 방금 전까지 몰랐다.

그는 잠시 그녀를 살폈다.

“이 동네 자주 오세요?”

“오늘이 처음이에요.”

거짓말.

“근데 혼자 오기엔 좀 심심해서요.”

하영은 일부러 웃었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저를 아세요?”

“아니요.”

“그럼 왜...?”

“그냥. 못 생겨서요”

"네...?"

"제가 못생긴 남자한테 관심이 많거든요"

"아하 신종 플러팅인가요?"

"대충 그런 셈이에요."

하영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서 왠지 말 걸고 싶었어요.”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이내 어색하게 풀렸다.

“이런 건 보통 잘 생긴 남자가 먼저 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제가 특이한 거죠.”

"근데 왜??"

"못생긴 남자들은 이쁜 여자랑 썸타거나 연애하면 바람은 안 필 거 같아서요."

"아하... "

잠깐의 정적.

그리고 그가 피식 웃었다.

“윤하영. 제 이름이에요.”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라도 알아야 다음에 또 말 걸죠.”

그는 몇 초 망설이다가 손을 잡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는 몰랐다.

그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모든 것은 비밀 많은 한 명의 여성이 계획한 것이라는 것을.


- 그리고 현재.

[윤하영.]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숨을 고르며 윤하영의 이름 석자를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반가움이 한없이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이야? 드디어 내 마음을 받아주기로 마음먹은 거야?]

하영은 피식 웃으며 공항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유리 너머로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냥 심심해서.”

[오...?? 드디어 나와 우리 윤하영 사이에 그린 라이트인가?]

“아니야!!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윤하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칼같이 거절했다.

[뭐야, 사람 괜히 기대하게 만들고 너무하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실망 가득한 말을 들으며 윤하영은 다시 피식 웃었다.

“꿈 깨, 제발. 다시 말하지만 난 이혼한 돌싱 남자한테는 관심 없다고.”

[뭐야 정말, 5년 전에 나한테 처음 접근할 때는 못생긴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해놓고.]

“그때는 오빠가 이혼한 돌싱이라는 걸 몰랐을 때잖아. 정말 내가 캐묻지 않았으면 평생 숨기려고 했으면서.”

[그럼 어떡해. 사실대로 말하면 바로 손절당할 것 같아서 걱정되는 걸.]

“됐어. 비겁한 변명하지 마.”

[하! 하! 미안. 근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먼저 전화를 다 걸고. 내일 전 세계가 평화로워지려나?]

윤하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너한테 글 봐달라고 전화하려 했는데.]

침묵.

“미안.”

윤하영이 작고 낮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응? 뭐가? 갑자기 왜 사과해?]

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이제 오빠 글 못 봐줘.”

[........]

“........”

두 사람 다 말없이 침묵했다. 윤하영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무슨 말이야? 왜 글을 못 봐준다는 거야? 내 글이 재미없어서 시간 낭비라는 거야?]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멍청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무슨 일인데?]

윤하영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 지금 인천공항이야.”

무슨 느낌이라도 받은 것일까. 전화기 너머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한국 떠나.”

하영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그리고 이제 한국 안 올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윤하영의 두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미안해.”

시간이 된 것일까. 윤하영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비밀 많은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윤하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 조용히 어루만졌다.

하영은 휴대폰을 굳게 쥐며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있잖아, 오빠.”

수화기 너머에서 숨이 거칠어졌다.

[어, 말해.]

“나 부탁이 있어.”

[뭔데? 말해봐.]

“오빠 딸한테 돌아가.”

침묵이 길게 흘렀다.

[윤하영.]

그가 낮게 말했다.

“혹시나 언제라도 내가 한국에 다시 오게 되면, 나 오빠랑 오빠 딸한테 배웅받고 싶어.”

[하영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오빠랑 오빠 닮은 딸한테 배웅받았으면 좋겠다.”

그의 숨이 거칠게 섞였다.

[윤하영.....?]

윤하영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이슬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그러면 나 정말 기쁠 것 같아, 오빠.”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비밀 많은 여성이 하영의 손을 살며시 쥐고 이끌기 시작했다. 윤하영은 한 손에 쥔 비행기 표를 더욱 꼭 쥐었다.

“그럼... 나 이제 비행기 타러 가야 해.”

목이 메었다.

“오빠, 글 쓰는 거 포기하지 마. 멀리 서라도 응원할게.”

[응. 그럴게. 나중에 꼭 한국 돌아와. 기다릴게, 딸이랑 같이.]

하영의 숨이 멎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에 고여 있던 이슬이 한꺼번에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응. 나중에 내가 한국 다시 오면 딸이랑 같이 배웅해 줘. 기대하고 있을게.”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나 이제 전화 끊을게. 힘내, 오빠. 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써.”

[알았어.]

그리고 통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순간, 손이 떨렸다.

하영의 손을 쥐고 있던 비밀 많은 여성은 말없이 앞서 걸었다.

하영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저물어가는 해도 보였다. 구름도 보였다.

지금 윤하영이 보고 있는 이 순간, 이 장면들은 언젠가 다시 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추억이 될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는 비밀 많은 여성을 따라 비행기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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