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12화에서 3년 뒤 여름.]
햇살이 얇은 커튼을 지나 방 안으로 번지고 있었다.
빛은 침대 위의 여성을 조용히 비췄다.
저주에 걸린 공주처럼, 그녀는 얕은 숨만 남긴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흐트러진 푸른빛의 긴 머리카락 위로 빛이 스며들자, 그녀는 동화 속 성녀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 안은 평온했다.
마치 잠든 그녀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분명 그녀였다.
많은 비밀을 품은 여자.
해커를 이용해 한국의 모든 비밀을 검은 옷의 사내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던 여성. 윤하영과 계약을 맺고, 그 사내가 글을 완성할 때까지 5년 동안 곁에서 도우라고 명령했던 인물.
지금 이 순간, 창가에서 스며드는 햇살을 받으며 가장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이 여자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침대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대형견 한 마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녀석은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섰다.
할짝.
따뜻한 혀끝이 그녀의 뺨에 닿는다.
잠든 공주에게 건네는 작은 주문처럼.
녀석의 주문이 통한 걸까. 깊은 잠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쭌..."
숨결에 섞인 이름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녀는 두 팔을 들어 녀석의 목을 감싸 안았다.
"어이구, 내 새끼."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얼굴선. 꾸미지 않아도 완성된 듯한
이목구비.
그녀는 한쪽 볼로 쭌의 얼굴을 비비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멈춰 있던 방 안의 시간이, 그제야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쭌아. 엄마 조금만 더 잘게."
이불속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녀석을 끌어안는다. 쭌은 작은 심장 박동을 느끼며 다시 그녀의 품에 몸을 맡겼다.
봄 햇살이 얇은 커튼을 통과해 둘 위로 내려앉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드르르르르—
핸드폰의 날카로운 진동음이 방 안을 찢었다.
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휴대전화 화면 위에 떠 있는 이름.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천천히 통화를 수락하며 귀에 휴대폰을 가져갔다.
[언제 올 건데.]
불만이 가득 밴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 맞다."
오늘의 약속이 떠오른 듯,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나한텐 사람 잡아다 놓고 기다리라고 해 놓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갈 때까지 담배나 피우면서 기다려."
[제정신이야?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기다리면서 담배 피다가는 폐암 걸리겠네.]
"시끄러워. 최대한 빨리 준비하고 갈게."
[씻고 화장하고 옷 입으면 반나절이잖아.]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좀 기다려."
뚝.
통화가 끝났다.
방 안에 다시 평온함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과는 다른, 현실적인 공기였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쭌을 바라봤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엄마 자는 동안 지켜준 거야?"
쭌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마치 당연하지라는 듯.
그녀는 몸을 기울여 녀석을 끌어안고 한참을 쓰다듬었다.
"나의 기사님, 밤새 근무하시느라 힘드셨죠?"
쭌은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세상에 둘 뿐인 것처럼 평온했다.
그녀가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얇은 잠옷 너머로 드러나는 선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가느다란 허리, 곧게 뻗은 다리. 잠에서 막 깬 얼굴에도 또렷한 이목구비는 선명했다.
꾸미지 않은 모습조차 신비로웠다. 조명이 없어도 빛을 받는 얼굴.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짙은 푸른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또 막상 준비하고 가려니 귀찮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알아서 죽이고 처리하라고 할까."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이미 몸은 천천히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 샤워를 마친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다.
문이 열리자 따뜻한 수증기가 복도로 천천히 흘러나왔다. 수건으로 물기를 대강 닦아낸 그녀는 화장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드라이기를 든 한 손,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빗어 올리는 다른 손.
위잉—
따뜻한 바람이 푸른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기를 머금고 있던 가닥들이 점점 가벼워지며 부드럽게 흩어졌다.
거울 속의 그녀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잠들어 있던 여자가 아니라, 또 다른 얼굴이 거기 앉아 있었다.
빗으로 머리카락을 곱게 정리했다. 한 올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스킨이 피부 위로 얇게 스며들었다. 손끝이 부드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파운데이션이 얇게 펴 발리고, 눈가를 스치는 브러시가 그림자를 더했다.
방금 전까지 공주처럼 잠들어 있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감정은 지워지고, 표정은 정돈됐다.
립스틱을 가볍게 눌러 바른 뒤, 그녀는 거울을 가만히 바라봤다.
완벽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정갈하게 정리된 옷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분한 색감의 원피스들, 절제된 재킷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짙은 네이비 색의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
옷이 몸을 감싸자 선은 더욱 또렷해졌다. 목선이 드러나고, 허리선은 단정하게 정리됐다.
마지막으로 향수를 손목에 한 번, 귀 뒤에 아주 희미하게 남겼다.
은은한 향이 공기를 바꿨다.
쭌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를 올려다봤다.
"다녀올게."
그녀가 낮게 말하자, 쭌은 짧게 꼬리를 흔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저택의 내부가 뒤로 물러났다.
높은 천장과 난간,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스러운 기사 쭌도 소리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 계단씩 내려올수록 그녀의 표정은 더 차분해졌다.
1층에 가까워질 즈음, 분주한 기척이 들렸다. 부엌 쪽에서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한창 집안일에 몰두하고 있던 식모가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녕하세요, 이모."
식모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허리를 숙였다.
"엄마랑 아빠는 어디 가셨어요?"
"두 분은 오늘 아침 일찍 해외여행 가신다고 나가셨어요."
"팔자도 좋으시네요." 짧게 내뱉고는 덧붙였다. "고생하세요, 이모. 저는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가 올게요."
"네, 아가씨. 다녀오세요."
그녀는 쭌에게 몸을 낮췄다.
"어이구, 내 새끼. 엄마 다녀올게. 집 잘 지키고, 이모랑도 잘 놀고 있어?"
쭌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든든하게.
문이 열리자, 바깥의 햇빛이 넓은 정원을 비췄다.
잘 다듬어진 잔디와 분수, 그리고 정문 앞에 대기 중인 검은 차량.
그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래서인지 공기조차 깨끗하게 느껴졌다.
"좋네."
작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고,
저택 안은 다시 평온해졌다.
집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검은색 고급 스포츠카를 향해 걸어갔다.
철컥.
차 문이 열리고, 그녀가 운전석에 앉았다.
철컥.
문이 다시 닫혔다.
시동 버튼을 눌렀다.
부아아앙—!
낮게 울리면서도 날카롭게 치솟는 배기음. 스포츠카만이 낼 수 있는 특유의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차는 부드럽게 출발해 목적지를 향해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잡은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고정한 채,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가고 있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항상 이렇다니까.]
잠을 깨웠던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신경질이 짙게 묻어 있었다.
"시끄러워. 그냥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간다니까."
[환장하겠다, 정말.]
뚝.
통화가 끊겼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조수석 위에 대충 내려놓았다.
한 손은 운전대를 느슨하게 쥔 채, 다른 손으로 창문을 조금 내렸다.
차 안으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모는 스포츠카는 도로를 가르듯 미끄러지며 목적지를 향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