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문을 열자마자 눅눅한 공기가 먼저 흘러나왔다. 물론 지하실은 아니었지만, 오래 환기되지 않은 지하의 냄새. 물과 먼지, 오래된 피가 섞인 듯한 탁한 향이 코를 찔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들어왔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한 남자가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녀를 보자마자 짜증을 내뱉었다. 남자는 평균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과하게 크다기보다는, 서 있기만 해도 시선이 한 번쯤 머무는 체격이었다. 어깨는 단정하게 벌어져 있었고, 재킷 아래로 드러나는 몸선은 군더더기 없이 정리돼 있었다. 과시하듯 부풀린 근육이 아니라, 필요 이상 드러내지 않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왜 맨날 이래? 항상 늦잖아.”
그는 이제 막 도착한 여성을 향해, 기다리며 쌓아두었던 불만을 가득 토해내기 시작했다. 말은 빠르지 않았지만 끊김이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여러 번 반복해 본 대사처럼.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 듯했다. 이미 여러 번 식었다가 다시 데워진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 익숙했고, 더 건조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피곤했고, 무심했다. 그녀는 남자를 사납게 노려본다.
"정신 사납다. 조용해라."
기다리는 동안 벽에 기대 선 채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을지, 담배를 꺼냈다 넣었을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화를 내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낮게 깔린 그녀의 태도가 더 신경을 긁었다.
"아.. 진짜...!!"
그녀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가방 끈만 고쳐 잡았다. 대답이 없자 남자의 목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아오... 판도라 상자 열듯이 풀어줄까 보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봤다.
“좀. 귀에 피나겠다.”
남자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한숨을 거칠게 내뱉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래. 차라리 내가 미치고 말지.”
그의 한숨이 낮게 가라앉았다. 더 말해봤자 의미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의 체념이었다.
그는 결국 입을 닫았다.
잠시 후.
“그래도 잘 잡았네?”
그녀의 시선이 방 안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방 한가운데,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묶인 손목은 거칠게 부어 있었고, 밧줄이 살을 파고들어 붉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어깨는 힘없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버티고 있는 모양새였다.
피가 말라붙은 셔츠, 묶인 손목, 축 처진 어깨. 얼굴은 얼마나 맞은 건지 곤죽이 되다시피 되어 있었다.
“고생 좀 했지. 생각보다 세더라. 싸움도 잘하고.”
“그래 보이네.”
두 사람은 감정 없는 얼굴로 청년을 내려다봤다.
그는 젊었다.
그는 이제 막 성인의 티를 벗어난 듯한 젊은 남자였다. 아직 소년 같은 선이 남아 있는 얼굴.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이라기보다는 억울함에 사로잡힌 얼굴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설명할 기회조차도 빼앗긴 사람의 표정이었다.
“얘가 정말 정도령이야?”
“확인 끝났어. 카레스도 맞다고 했어.”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이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래도 꼭 죽여야 해?”
“명령이야. 지금 마음 약해져서 못 죽이면, 나중에 한국이 골치 아파지니까.”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도령이면 원래 나라를 일으킨다는 그 존재 아니야?”
“원래는 그랬지.”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얘가 성령의 방패랑 손을 잡았어.”
“왜 하필 거기랑?”
“자기 이상을 제일 빨리 실현시켜 줄 세력을 골랐겠지. 똑똑하니까.”
잠깐의 침묵.
“머리 좋네.”
“그러니까 정도령이겠지.”
그녀가 몸을 한 번 떨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아.”
남자가 청년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힘없이 흔들리던 머리가 빛 아래로 드러났다.
청년의 곤죽이 된 얼굴을 살피는 남자의 얼굴에는 고민이 쌓인다.
“흠....? 진짜 죽일 거야?”
잠깐 망설임이 스쳤다.
“카레스 명령이야. 더군다나 성령의 방패랑 손을 잡았잖아.”
여자가 낮게 중얼거리며 청년을 매섭게 노려본다.
“지금 중요한 건 성령의 방패의 세력이 더 강해지는 것을 막는 게 목적이야. 더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해.”
남자가 청년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입에 가져간다.
“하필 네가 거기랑 붙었네.”
“앞에 세워두기 딱 좋잖아. 민심도 얻고, 상징성도 있고.”
여자가 청년을 내려다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성령의 방패는 널 방패로 쓸 거야. 앞에 세워놓고 자기들은 뒤에 숨어서 피 한 방울 안 묻히겠지. 이득이란 이득은 다 챙기면서 널 마음껏 이용해 먹겠지.”
청년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은 걸까?
그 순간.
청년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그러나 분명히.
여자가 미간을 천천히 좁혔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청년을 내려다봤다. 그 시선에는 망설임도 없었으며. 감정도, 연민도 없었다. 마치 발끝에 붙은 벌레를 내려다보듯. 지금 당장 짓밟아도 아무 일 아니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봐. 저 미소.”
“여기서 살아 나가면 우리 다 죽이겠다는 얼굴인데.”
남자가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계산을 하고 있겠지.”
“머릿속으로 수십 번은 시뮬레이션 돌렸을 거야. 삼류 액션 영화처럼.”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참 유감이네. 그렇게 기다리던 정도령이 하필 성령의 방패랑 손을 잡다니.”
“상징성은 최고지. 언론 이용해서 앞에 세워두면 민심은 다 따라올 테니까”
잠깐의 침묵.
방 안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죽이는 거야.”
“얘를 지금 죽여서 5년 뒤에 일어날 군사 반란을 막아야 해.”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전에 말했던 그 군사 반란?”
“그래. 얘가 살아 있으면 성공할 테니까. 비록 우리 같은 대운을 짊어진 자들 만큼은 아니지만 통찰력은 무시 못해.”
묶인 손목에서 피가 마른 자국이 갈라졌다. 청년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랏 같은 희망을 품으며.
“만약 그 반란이 성공하면?”
“아시아는 다시 불붙겠지. 아시아의 화약고가 정상 작동하면서.”
짧은 정적.
남자가 입에 담배를 가져간다. 라이터 불꽃이 청년의 눈동자에 잠깐 비쳤다. 불꽃이 사라지는 순간, 그의 눈도 다시 어둠에 잠겼다.
“설득의 필요성은? 설득해서 우리 쪽으로 끌어 올 수도 있잖아?”
“그게 가능했으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잡아 오지도 않았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스테이크를 칼질하면서 웃으면 이야기 중이었겠지”
남자의 눈빛에 날카로움이 서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죽이면 반란은 실패. 살리면 전쟁. 선택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남자는 몇 초간 청년을 바라봤다. 담배 연기가 천천히 위로 흘렀다. 그리고 형광등 빛 속에서 흐릿하게 퍼진다.
“처리해.”
여성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홀린 듯 남자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천천히, 망설임 없이.
곧 검은 권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금속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뜩였다.
딸칵.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청년은 고개를 숙였다.
체념인지, 계산의 끝인지 알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작은 속삭임. 누군가의 이름 같기도 했다.
남자의 눈에 잠깐 흔들림이 스쳤다.
그리고.
총구가 고개를 숙이고 죽을 준비를 마친 청년으로 향했다. 총을 쥐고 있는 남자는 괴로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청년을 바라본다.
"성령의 방패랑 손만 잡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그는. 천천히 쥐고 있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위하여 손가락에 힘을 준다.
"미안하다."
[탕]
총성이 공간을 찢었다.
청년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고 의자가 균형을 잃고 넘어가며 바닥을 긁었다.
[쾅]
결박된 몸이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쓰러졌다.
피가 터지듯 흘러나왔다. 붉은 액체가 바닥의 미세한 홈을 따라 느리게 번졌다. 형광등 빛 아래에서 색이 더 짙어 보였다.
형광등이 다시 한번 깜빡였다.
총을 든 남자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담배 끝이 길게 타들어가 재가 떨어졌다.
재가 피 위에 닿았다가 금세 젖어 사라졌다.
“끝났네.”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그녀는 잠시 청년을 내려다봤다.
반쯤 열린 눈동자.
그 안에 남아 있던 계산과 가능성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정말 끝난 걸까.
그녀는 아주 짧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가자.”
발걸음이 멀어졌다. 철문이 열리고, 닫힌다.
[쾅.]
발소리가 계단 위로 사라지며 점점 멀어진다
다시 정적.
형광등 불도 꺼진 공간.
바닥 위에 쓰러진 청년의 눈은 반쯤 떠져 있었다. 그가 품었던 던 가능성, 미래, 이상, 모두 멈춰 있었다.
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졌다. 방 한가운데 작은 붉은 지도가 그려졌다.
쓰러진 청년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하듯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그가 꿈꾸던 목표는 그의 죽음과 함께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