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파악 71

17화

by 가비

잠옷 차림의 므아가 계단을 내려왔다.

발바닥에 닿는 하얀 대리석의 차가운 감촉에 살짝 몸을 움찔하며,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1층을 한 번 둘러보았다. 하지만 특별히 눈길이 머무는 곳은 없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머리카락은 반쯤 흐트러진 채였고, 표정은 아직 세상과 제대로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머,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이모가 므아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모. 저도 밥 주세요."

므아가 눈을 비비며 나직하게 말했다.

"금방 차려드릴게요."

"감사해요, 이모."

므아가 식탁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그 자리에 이미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므아의 집에서 식모로 일하는 아주머니가 차려 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먹고 있는 카즈마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집 식탁이 자기 자리였던 사람처럼, 그는 숟가락질 하나에도 망설임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므아는 카즈마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마주 앉는 것만으로도 이미 선전포고처럼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넌 부대 복귀 안 해?”

싸늘하게 던진 한마디였다.

카즈마가 숟가락을 잠깐 멈추더니 힐끗 고개를 들었다.

“왜 보내지 못해서 안달이야?”

카즈마는 숟가락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

"더 있다가는 정들 것 같아서. 정들기 전에 좀 보내려고."

므아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카즈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므아가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고, 국물을 한 모금 떠 마시고, 밥 한 숟갈을 얹는 그 행동조차도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집 밥상이 낯설지 않은 사람 가족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카즈마의 그런 모습이 더 거슬려 보인듯했다.

"이제 기운 좀 차렸나 보네."

므아가 한 마디 더 얹었다.

"너 정말..."

카즈마가 눈을 살짝 들어 므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정들 때까지 푹 쉬다 가야지."

"그거만 먹고 좀 가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더라."

므아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카즈마를 노려본다.

"니가 개냐?"

"이 시간 이후부터 저는 개입니다. 왈왈."

"아, 진짜..."

므아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미간을 좁혔다. 정말 개 취급을 해줘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이모가 조심스럽게 므아 앞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잘 차려진 아침상이었다.

따뜻한 국 냄새가 주방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쉬다 가게 해주세요, 아가씨. 둘이 이미 뭐..."

이모는 말끝을 흐리더니 슬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어르신들도 이제 결혼하겠거니 하고 생각하실 정도인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므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귀 끝까지 붉어지는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아, 이모도 진짜...!!"

"호호호..."

이모는 모른 척하며 능청스럽게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이 던진 말의 파장 따위는 전혀 책임지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카즈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여유로워 보였다.

"내가 다른 식당이나 다른 이모들 밥도 다 먹어 봤는데."

그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너네 집 이모 손맛이 제일 좋더라."

므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싸우고 싶지만 이길 수도 없고, 내보내고 싶지만 명분도 없고, 화를 내기엔 그럴 감정조차 낭비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므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숨 한 번으로 이 상황을 넘기기로 한 것 같았다.

카즈마가 그런 므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배 안 고파?"

"갑자기 밥맛이 떨어질까 말까 그러네."

"좀 먹어. 너 어제 고양이 데리고 온 순간부터 한 끼도 못 먹었잖아."

카즈마의 말에 므아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가 그것까지 알고 있다는 게 의외였는지,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마치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들켜 버린 사람처럼.

"아니면 내가 좀 먹여줘?"

"하아..."

므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번 한숨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을, 겨우 겨우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전생에 남매였던 내 탓이다."

므아는 결국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얼굴로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그녀는 국그릇에서 조심스럽게 한 숟갈을 떠 입에 넣었다. 따뜻한 국물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므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국 괜찮지?"

이제 막 입을 다시 다물고 있는 므아에게 카즈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네."

므아가 짤막하게 인정했다.

"괜찮다니까. 진짜 너만 괜찮으면, 나 너네 집에서 살고 싶을 정도라니까."

"미쳤니?"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므아를 향해 카즈마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야, 밥 다 먹었으면 가라 좀."

므아가 대 못을 박듯 말했다. 카즈마는 빈 그릇을 내려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맛나게 드세요, 공주님."

므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미친 놈아, 내가 이 나이 먹고 공주님 소리 들어야겠냐?"

"이쁘면 다 공주지. 별 걸 다 가지고 부끄러워하네."

"너 저기 칼 보이지?"

므아의 눈이 식탁 위 칼꽂이를 향했다. 카즈마는 그제야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들었다.

"윽... 미안. 밥 맛있게 먹어."

카즈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므아는 그제야 어깨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마음 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이모가 준비해 준 반찬들을 하나둘 집어 들며,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므아가 빈 그릇을 싱크대에 옮기고 남은 반찬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딸깍.]

현관문이 열리며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거실에서 고양이와 놀고 있던 카즈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청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마치 손에 칼을 들고 사람을 난도질하고 있는 악마를 마주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공포라는 감정이 그대로 얼굴 위에 쏟아진 듯한 눈이었다.

“안녕하세요...? 형님..?”

청년의 목소리까지 강풍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카즈마가 피식 웃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카즈마는 팔짱을 낀 채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우리 므아의 부모님에게 입양된, 므아의 동생이자... 전 세계 어지간한 국가와도 사이버 전쟁이 가능한 해커님 아니신가?”

청년은 뒷걸음을 치며 카즈마에게서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하하... 저기, 모른 척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이번에는 한 발짝 옆으로 비켰다. 카즈마의 정면에서 최대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다.

카즈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넌 왜 나만 보면 그렇게 다 죽어 가는 사람 얼굴이 되냐?”

청년은 잠깐 시선을 피하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냥... 형님 볼 때마다 머리가 척추 통째로 뽑힐 것 같아서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즈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얼굴에서 모든 유연함이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 남았다.

그 표정에는 정말로 한 번 뽑아 볼까 잠깐 고민하는 기색까지 스쳐 지나갔다.

"뭔 헛소리야?"

목소리도 한 톤 낮아졌다.

청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있어요, 그런 게...."

청년은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카즈마를 피해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므아가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카즈마의 날 선 시선이 등에 꽂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모른 척 발걸음을 옮겼다.

멈추면 끝장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안녕하세요, 두목?”

주방으로 들어선 청년이 므아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방금 전의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므아가 짜증 섞인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너 그 두목 소리 언제까지 할래?”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아도 형제는 형제인데, 남처럼 대할래?”

“두목이 뭐라고 해도, 한 번 두목은 영원한 두목이라니까요.”

청년의 말에는 고집스러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므아는 한숨을 참으며 식탁 위에 놓인 칼을 가리켰다.

“너 이 칼 보이지?”

청년은 칼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능청스럽게 웃었다.

“설마 그 칼로 저를 죽이신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국가 안보에 크나큰 손해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장담합니다, 두목.”

“하아... 오늘 아침부터 카즈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므아는 잠깐 천장을 올려다봤다. 뭔가 깊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분명 악몽을 꾸는 게 분명해.”

“꼬집어 드릴까요?”

“그냥 네가 이 칼에 한 번 찔려 보는 게 어때? 그럼 내가 꿈인지 현실인지 더 빨리 알게 될 것 같아.”

“죄송합니다, 두목.”

“정말 머리가 터질 거 같아...”

“헤헤.”

청년은 태연하게 웃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므아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넌 왜 왔냐?”

“아침밥 먹으러 왔는데요?”

“니들은 우리 집이 무슨 음식점이니?”

“두목, 일단 저는 두목의...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인데요...”

므아는 귀찮다는 듯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알아서 먹고 가라.”

청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 안을 더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였다.

므아가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청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 두목. 그 남자 말인데요.”

므아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청년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3년 넘도록 가정만 돌보더라고요. 회사, 집. 회사, 집. 회사, 집. 계속 그거예요.”

동생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므아의 얼굴 위로 옅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눈빛이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그녀 자신도 어쩌지 못했다.

“안 궁금했는데 알려줘서 고맙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했다.

므아는 행주를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주방을 나왔다.

주방을 나오자 소파에 앉아 애린이와 씨름하고 있는 카즈마가 눈에 들어왔다.

므아의 미간이 바로 좁아졌다.

“너 지금 뭐 하냐?”

“나? 고양이랑 놀아주는 중인데?”

카즈마가 천진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므아는 애린이의 상태를 제대로 봤다.

아기 고양이는 작은 발로 카즈마의 손을 연신 할퀴려 하고 있었다. 털은 잔뜩 곤두서 있었고 눈은 크게 떠져 있었다. 귀는 납작하게 눕혀져 있었다.

완전히 방어 자세였다.

“넌 그게 놀아주는 거라고 생각해?”

“이게 아기 고양이랑 놀아주는 거 아니야?”

“미친 놈아! 애린이가 지금 스트레스받아서 손톱 세워서 계속 너 할퀴려고 하잖아!”

므아가 성큼 다가서며 화를 냈다.

카즈마가 그제야 애린이를 다시 들여다보더니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애린이를 왜 건드려!”

“미안... 난 그냥 애린이가 귀여워서.”

카즈마는 므아의 눈치를 보며 아기 고양이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애린이는 발이 닿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파 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치 오랜 괴롭힘 끝에 겨우 구조된 동물처럼,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어휴...!!”

므아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안 보이던가 해야지.”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카즈마도 말없이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집 밖으로 나오자 조용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아직 완전히 높지 않은 오전의 햇살이 비스듬히 땅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므아는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걸었다.

카즈마는 반 걸음쯤 떨어져 따라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치 지금 므아 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일이 침묵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므아의 걸음이 멈춘 곳.

소중한 친구가 잠들어 있는 산소 앞이었다.

비석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위에는 분명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08년 7월 14일

광휘의 여신 아휘, 이곳에 편히 잠들다.]

“하아...”

므아는 비석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는 오늘 하루의 피로와, 아침에 들은 이름,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조용히 섞여 있었다.

카즈마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비석을 바라봤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바람이 한 번 불어왔다.

므아의 머리카락이 살랑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기는 좀 살 만하니, 아휘야?”

므아의 얼굴 위로 그늘이 내려앉았다.

“차라리... 나도 너 따라갈까 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카즈마가 조심스럽게 므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무리 답답해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손 치워.”

므아는 자신의 머리를 허락도 없이 만지고 있는 카즈마의 손을 툭 쳐냈다.

“므아야...?”

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석만 바라봤다.

“그냥 형 데리고 올까? 여기서 형 있는 곳까지 20분이면 가잖아.”

“하아...”

므아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형 데리고 와서 다 같이 이야기해 보자.”

므아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카즈마를 노려봤다.

두 눈에는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데리고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할 건데?”

“그건...”

“내가 뒤에서 다 조종했다는 이야기 하라고?”

므아는 카즈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만 답답한 거 아니야. 나도 답답해.”

“근데 어쩔 수가 없네?”

“내 안에 빙의되어 있는 천족의 카레스가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여기서 그 인간 데리고 와서 이야기하라고? 다 죽는 꼴 보고 싶어!?”

“그게 아니라...”

“그냥 좀 기다리면 안 돼?”

므아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너만 답답한 거 아니라고. 나도 답답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구는 그 인간 책 알려지는 꼴 보기 싫어서 블랙리스트에 올린 줄 알아?”

카즈마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내년에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그 전염병이 끝나면... 그 인간은 다시 세상에 나타날 거고.”

“그러니까 그냥 기다려.”

“므아야...?”

“때가 되면 내가 왜 그 인간을 한국 문학계에서 활동 못 하게 만들었는지 다 알게 될 거야.”

므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 인간도 고통을 감수해야겠지.”

카즈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날카롭게 날이 서린 가시가 돋친 장미 꽃밭을 맨몸으로 지나면서 생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장미 꽃밭을 지나오면, 눈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운 낭떠러지가 기다리겠지."

"그리고 그 인간은 선택해야 할 거야."

"뛰어내릴 것인지, 아니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것인지."

"정말......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 인간의 숙명이야."

"우리 대운을 짊어진 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운명을 지닌 자로서의 숙명."

므아는 더 이상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산소와 비석에만 시선을 모았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울고 지나갔다. 그 울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어졌다.

하지만 소리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그 여운이 공기 속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므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비석 위에 얇게 쌓여 있던 흙먼지를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잠시 후,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카즈마도 아무 말 없이 므아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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