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선택도 하고 싶지 않을 때

by 동이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이토록 무겁게 다가오는 날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어떤 옷을 입을지,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사소한 일조차 거대한 바위처럼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 가득한 옵션들은 이제 정보가 아니라 피로로 다가오고, 나는 그저 모든 전원을 끄고 암흑 속에 잠기고 싶어집니다. 세상은 더 빠르게 결정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라고 다그치지만, 내 안의 동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채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선택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뜻이고, 그 책임의 무게를 견디기에 오늘의 나는 너무나 가냘픈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누군가 던진 평범한 질문에도 대답할 힘이 없어 그저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게 됩니다. 사실 아무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동안 너무 많은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시선에 맞춘 선택,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선택, 생존을 위한 비겁한 선택들이 층층이 쌓여 마음의 체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제는 내 의지라는 근육이 마비되어 버린 듯, 어떤 방향으로도 발걸음을 떼고 싶지 않은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무기력하다거나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압니다. 이것은 내 영혼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언한 일시적인 '중단'이자 '파업'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시간은 무의미한 공백이 아니라, 흩어진 자아를 다시 불러모으는 응축의 시간입니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외부와의 소통을 끊고 오직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에너지를 보존하는 과정입니다. 오늘 하루쯤은 메뉴를 고르지 않아도, 내일의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태양은 다시 떠오릅니다. 나침반의 바늘이 미친 듯이 떨리며 북쪽을 찾지 못할 때, 억지로 바늘을 고정하기보다 그 떨림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아도 괜찮아."

스스로에게 건네는 이 허락은 그 어떤 성취보다 달콤한 휴식을 선사하며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켜 줍니다. 우리는 꼭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며, 때로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지나가는 구름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습니다. 선택의 권리를 잠시 내려놓음으로써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큰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오직 '존재' 자체에만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방 안의 가구들이 제자리에 있듯, 나도 그저 이 공간의 일부가 되어 공기처럼 머물고 싶어집니다. 벽지의 무늬를 한참 동안 관찰하거나, 창문에 맺힌 빗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는 궤적을 쫓다 보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투명해집니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보상보다도 깊고 아늑합니다. 사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의 팔할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의 걱정을 방어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불필요한 껍데기들을 하나씩 벗겨내고 나면, 알맹이처럼 남은 진실한 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저 숨을 쉬고, 심장 소리를 듣고, 내 손등에 내려앉은 햇살의 온기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거창한 선택보다 우선되어야 할 생의 감각입니다. 마음이 충분히 쉬고 나면, 어느 순간 다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아주 작은 열망이 싹트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손가락 끝이 움직이고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있을래."

이 고집스러운 침묵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문이 닫힌 것 같아도, 내 안의 평온은 이 정적 속에서 더욱 단단하게 여물어 갑니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권리를 누리는 이 시간, 나는 비로소 타인의 지도가 아닌 나만의 나침반을 다시 수리하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인생이라는 긴 긴 문장에서 잠시 쉼표를 찍는 것일 뿐, 당신의 이야기는 여전히 아름답게 흐르고 있으니까요. 이 고요한 멈춤 끝에 찾아올 진정한 시작을 위해, 나는 지금 이 무위의 시간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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