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말로 나오지 않을 때

by 동이

입술 끝에 걸린 단어들이 차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으로 고이는 날이 있습니다. 마음은 이미 수천 개의 문장을 써 내려갔지만, 공기 중으로 흩어져야 할 소리는 길을 잃은 채 식도 어딘가에 머뭅니다. 누군가 내게 안부를 물을 때, 나는 가장 적절한 대답을 고르려다 결국 짧은 미소로 갈음하고 맙니다. 머릿속의 풍경은 이토록 선명한데 왜 혀끝은 이토록 무겁고 둔탁한 것일까요. 소통이라는 명목하에 뱉어지는 말들이 때로는 진심을 훼손하는 것 같아 겁이 나기도 합니다.

"무슨 생각 해?" 친구가 묻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찻잔 속의 잎사귀가 가라앉는 모양을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그냥, 단어들이 아직 잠에서 덜 깼나 봐."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나의 언어들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문장은 머릿속에서 완벽한 구조를 갖추었다가도, 입술을 통과하는 순간 비정형의 얼룩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마치 덜 마른 수채화 물감이 종이 위에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번져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침묵을 공백이라 부르지만, 나에게 이 순간은 가장 밀도 높은 외침의 시간입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언어의 한계를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요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단어라는 좁은 틀에 가두려 했던 오만이 나를 침묵하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슬픔은 슬픔이라는 두 글자보다 훨씬 더 깊고 푸른 바다를 닮았으니까요. 기쁨 또한 환호성보다는 잔잔한 햇살의 일렁임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말을 꺼내기보다 내 안의 침묵이 충분히 숙성되기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침묵은 단절이 아니라, 더 깊은 이해를 위한 준비 운동일 뿐입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의 진동은 상대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나의 침묵을 오해하지 않는 사람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말이 없어도 그 여백을 온기 있는 시선으로 채워주는 이가 그립습니다. 가끔은 침묵이 가장 정직한 대화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삽니다. 억지로 꾸며낸 수식어보다 담백한 고요함이 더 큰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나의 혀끝에 맺힌 침묵은 아마도 내일의 가장 아름다운 첫 문장이 될 것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이 고요한 잉크가 내 마음의 종이 위를 충분히 적시도록 내버려 둡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유 없이 예민해질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