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가 날 좋아하나 봐!

'우주, 책, 사랑'

by 구피


삶이 어쩐지 좀 헛헛하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도서관에 가서 꼭 하는 게 있다. 도서관 한 바퀴를 빙 돌며, 제목만 보고 끌리는 책들을 촬영하거나, 메모장에 적어보는 것이다. 그럼 보통 한 10에서 20권의 책이 기록되는데, 제목을 쭉 읽어보면 겹치는 주제들이 보인다.


‘사랑, 글, 술’


그때 나도 몰랐던 요즘 나의 관심사와 사랑하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윤서가 우주에 남다른 사랑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역시 책 덕분이었다.

우주를 담을 수 있는 것이 지구에 존재할까. 있다면 그중 하 나는 책이다.

윤서는 우주에 가지 못해 책을 찾는, 그러니까 책보단 우주가 좋아 도서관에 들르는 아이였다.


워낙 그림과 사진이 많은 우주 책은 커다랗고 투박하다. 그런 무거운 책을 두세 권 꼬옥 안고, 뒤뚱거리며 반납 데스크로 걸어오는 윤서의 걸음걸이가 꼭 우주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책을 들고 있지 않아도 윤서는 그렇게 걷는 아이였다. 워낙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자연스레 행동이나 말이 느렸고, 키가 크는 속도도 또래에 비해 느렸다.

무엇이든 빠른 것보다 느린 것에 가까운 아이였다.


그중에서도,

윤서가 가진 것 중 가장 느린 건 마음 같았다.

화장실도 꼭 친구와 함께 가는 여느 또래들과 다르게 윤서는 개학하고도 2달 정도 혼자 도서관에 왔다. 윤서와 내가 어색함 없이 말을 트기 시작한 것 역시 근무 시작일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기야. 한 별에서 다른 별까지 몇 광년이 걸리기도 한다던데, 한 우주와 한 우주가 가까워지는 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사실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윤서의 마음이 지구를 지나 우주에 닿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윤서에 대한 궁금증이 구름에 닿을 만큼 겹겹이 쌓여갈 때쯤이었다.


“우주 좋아해? 선생님도 어렸을 때, 우주 되게 좋아했는데.”


장군을 닮은 어른이 갑작스레 말을 걸어 윤서는 많이 놀란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더 놀랐다. 윤서는 뚝딱거리다 고개만 끄덕이곤 책을 챙겨 후다닥 도서관을 나갔다.

‘아…. 괜히 말 걸었다.’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이 생겨 괜히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조용히 옷 구경만 하고 싶은 손님에게 이 옷 어떠냐며, 비싼 코트를 들고 오는 부담스러운 직원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윤서는 바로 다음 날 도서관에 들렀다. 여느 때처럼 두꺼운 우주 책을 들고 뒤뚱거리며 데스크로 걸어왔다. 전에 빌린 책과 새롭게 빌리게 될 책들이 데스크 위로 올라왔다.

바코드를 찍기 위해 반납 책을 잡았을 때,


“그 책은 재미없고, 이 책은 재밌었어요.”


이번에 먼저 말을 건 건 그 애였다.


“그래? 이 책은 왜 재미없었어?”
“사진이 적어서요. 그리고 우주도 좋아하는데, 저는 블랙홀이 더 좋아요. 뭐든 빨아들인다는 게 신기해요. 사실 옛날엔 지구도 빨아들일까 봐 좀 무서웠는데. 이젠 별로 안 무서워요. 그리고 저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우주에 가보고 싶어요. 우주비행사들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맘껏 말하려고 그동안 말을 아껴왔던 걸까. 윤서는 정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신이 왜 우주를 사랑하는지 얘기하다 도서관을 떠났다. 어쩌면 어저께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던 것이 신경 쓰여, 나를 다시 만나면 어떤 말을 할지 생각해 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우주에 관해 얘기하며 환하게 웃는 윤서의 표정을 보며 새하얗게 웃는다는 게 뭔지 처음으로 알았다.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사람은 저렇게 새하얗게 웃는구나.


윤서는 올 때마다 몇 페이지의 우주 사진이 예쁜지, 직접 펼쳐서 나에게 보여줬다. 알면 알수록 윤서는 우주 외에 일들에 대해선 정말 무감해 보였다. 우주를 사랑하는 우주비행사 지망생인 줄 알았더니, 꼬마 외계인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 원래 알고 있던 우주 지식도 윤서에게 들으면 더 재밌었다. 나보다 더 우주를 사랑하는 애니, 그 애를 한 번 거쳐 나온 우주에 관한 내용은 좀 더 사랑스러워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윤서를 통해 우주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었고, 우주 덕에 윤서라는 한 우주에 대해서도 좀 더 알게 되었다.


같은 방법으로,

윤서가 우주 말고 다른 관심사가 생겼다는 걸,

나에게 속수무책으로 들키게 된 것 역시 책 때문이었다.


윤서는 여느 때와 달리 우주 서적 책장으로 직행하지 않고, 도서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아주 천천히, 또 고심이 책을 골랐다. 덕분에 나는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애가 들고 올 책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들고 온 책은 아주 얇고 분홍빛이 도는 책이었다.


‘쟤가 날 좋아하나 봐!’


윤서가 책을 내밀었을 때, 순간 멈칫했다.

아주 아주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윤서는 내가 바코드를 찍는 동안 데스크에서 두 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처음 내가 말을 걸었던 날처럼 도망치듯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그간 내가 봐온 윤서의 걸음 중 가장 빨랐다.


‘너를 좋아하는 것 같은 남자애가 생겼니?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애가 생겼니?’


꼬마 외계인의 호기심을 자극한 꼬마 지구인은 누구일까.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윤서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한 입을 열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만약 윤서가 그 애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는 날이 온다면, 윤서는 또 그 애의 사랑스러운 점을 아주 잘 찾아내어 나에게 말해줄 거라 생각한다.


감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던가.

관심사와 사랑이 책으로 드러나는 도서관에선 더더욱 그런 가보다.


아무쪼록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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