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y의 사소한 긁적임 May 27. 2021

오늘도 하이볼

내 탓이지만 괜찮아

오늘 하루는 참 마음이 복잡했다. 복잡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몬드리안호텔 TAKA에서의 산토리 가쿠 하이볼

첫번째. 교사로서 가장 몸이 편할 때는 아이들에게 시험지를 던져줄 때인데, 마음은 제일 불편한 날이다. 나름 아이들 수준을 파악하였다고 생각하고 문제의 난이도를 조절하였으나 학생들과 나는 동상이몽이였나보다. 시험 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 왈, "선생님, 이거 다시는 안하면 안되요?" "선생님, 너무 힘들었어요" "선생님, 쓰느라 팔이 떨어질 것 같아요" 원격수업 때문에 학교에도 많이 못와서 가뜩이나 짠한데, 그 많은 시험을 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게다가 나름 자기네들을 이해해준다는 선생님이 문제를 이렇게나 어렵게 냈으니. 너무 맘이 쓰였다.

와사이 진에서 짐빔 하이볼

두번째. 오늘 하루종일 남편이 어제 갔던 시장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실 어제 퇴근하고 새로운 곳에 가보자고 하며, 신당동 중앙시장에 데려갔다. 요즘들어 그 장소에 오래된 노포 맛집도 새롭게 조명을 받는다고 하고, 다양한 맛집이 생겨나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당동 중앙시장에 대해 힙스터들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신당동 중앙시장에는 돼지부속물 처리 및 조달하는 장소가 있다. 그 곳의 오른쪽 부분은 거의 대부분 돼지삶는 잡내가 진동을 한다. 벗어나와도 마스크에 그 잡내가 새며들어 예민한 사람들은 계속 맡게 되는거다. 돼지냄새에 예민한 남편은 중앙시장에서 계속 돼지냄새난다고 했고, 나는 "너가 예민한거야"라고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한잔은 하고 가야되지 않겠냐며 고집을 피워 우리는 시장에 어묵파는 곳에서 어묵 2개와 맥주한잔을 시키고 30분만에 후다닥 먹고 나왔다. 오늘 남편이 아직도 그 냄새가 잊혀지지가 않는다며 카톡이 계속 왔고, 이상하게도 나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성수동 아타리에서 산토리 진저 하이볼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죄책감"일 것이다. 엄청 소심쟁이에 피플플리저인 나는 대단하게 작은 것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나의 의도로 인해 남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으면 너무 신경쓰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아이들과의 일은 아이들이 공부를 조금 덜 한 것도 있을 것이고, 남편과의 일은 남편이 유난히 돼지 냄새에 예민해서 이러한 상황들이 벌어진 것일텐데, 나는 자꾸 내 탓만 하게 된다. 

을지로 Lost&Found 에서 메이커스마크 하이볼(feat.로즈마리)

하지만 여기서 더 내 탓을 하게 되면 폭식의 굴레로 떨어진다는 것을 여러 회기의 심리상담으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내 탓을 할 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나의 행동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해서 상쇄시키자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산토리 하이볼을 마신다. 적당한 씁쓸함으로 시작하지만 레몬과 탄산수로 인해 깔끔함으로 정리되는 이 음료수는 요상하게 사람을 안정시켜준다. 쓰지만 괜찮아. 내 탓이지만 괜찮아. 

나의 '죄책감' 힐러(Healer) 산토리 가쿠 하이볼


작가의 이전글 인쇄의 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