쫌생이 자격지심 2019년 8월 20일
오늘은 아내가 11시에 선릉역 근처 북 카페에서 모임이 있어서 아침부터 서둘렀다.
아이 친구 엄마가 자신의 회사에서 주최하는 유인경 작가 강연회에 초대하여 가게 되었다.
필라테스를 마친 아내를 픽업해 집에 들어와 급하게 외출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말다툼을 했다.
아내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어, 혼자 집에서 자유시간을 갖는다며 좋아했더니, 아내가 미션을 줄까 하면서 화장실 청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농담 섞인 얘기였는데도 왠지 자격지심 때문인지 기분이 나빠졌다. 아내는 다시 "무선 청소기 통 청소를 부탁할까?" 라며 중얼거리는데, 나는 갑자기 화가 나서 " 네가 이제 미쳤구나!"라고 포문을 열었다.
자신의 농담에 과잉반응 하는 나에게 아내도 황당해하며 "당신은 집에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으려 하냐"며 대꾸를 했고, 나도 "그럼 당신은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냐" 며 응수했다.
순식간에 집안은 조용해졌고, 아내는 안방에서 화장만 하고 있었고, 나는 마루 소파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얘기조차도 넘기지 못하고 아내를 공격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지만, 상한 기분을 더욱 증폭시켜서라도 내 감정을 합리화하고 싶었다.
결국 나갈 시간이 임박해 아내가 아침에 함께 본 시골노총각들 맞선 프로 결과 이야기로 물꼬를 트는 바람에, 다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었으나 뭔지 모르게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백수 남편의 자격지심에서 생긴 부부싸움의 불씨는 아내의 신속한 초기대응으로 진화가 됐으나, 요즘 내 모습을 보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불안하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나 싶었는데, 지나치는 말에 구태여 상처받았다며 삐져버리는 내 모습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 남자는 밖으로 나가야지 집에 있으면 쫌생이가 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아내에게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냐고 큰소리를 쳤지만, 집안일은 모두가 아내가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저 아이들 픽업과 분리수거만 하면서 아내와 매일 고스톱 치고, 멋진 카페 찾아다니며 노는 궁리만 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내 자격지심에 아내가 시키는 일은 더 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능력 있는 남자일수록 오히려 가정적이고, 못난 남편들이 더 무게 잡게 잡고 가부장적으로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오후 6시가 넘어 막내를 학원에 데려다주며 아내에게 카톡을 해보니, 우리가 자주 갔던 선릉 옆 카페에 있다며 와달라고 했다. 다행스러운 마음에 가보니 친구 엄마와 카페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 엄마 집까지 바래다줬다. 오랜만의 외출에 힐링이 되었는지 아내 기분이 좋아 보였고, 나도 때 맞춰 픽업을 해줘 덜 미안해졌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부 얘기해 주느라 밤늦게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고스톱을 치며 포도를 너무 많이 먹고 마루에 나와 일기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