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결혼 19년 차 일기

by 일로

갱년기 2019년 10월 8일


요즘 불안 불안하다가 오늘은 결국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정말 별것 아닌 것에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며 한참 야단을 치는 바람에 규은이는 마루에서 컴퓨터를 하다가 울면서 방으로 들어갔고, 여은이는 과외 시간을 늦추기까지 했다. 내가 점점 이상해지는 걸 느낀다.

원래 자격지심이 심하고 자존감이 낮은 데다가, 오십이 넘으면서 남성 호르몬이 줄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 일도 아닌 일에 갑자가 화가 나기도 하고, 소심하게 오해를 하기도 한다.


오늘도 아이들 학교에 바래다주고 헬스를 하고 들어와 한가한 오후 시간을 보내다 막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복숭아를 깎아 막내와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여은이가 왔다. 퉁명스러운 여은이가 부엌에서 물을 먹더니 컵에서 세제 냄새가 난다고 하며 물통을 내 얼굴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어제부터 규은이도 컵에서 세제 냄새가 난다고 해서 왠지 미안했는데, 물통을 내 코에 갖다 대니 기분이 상했다. 냄새를 맡아보니 보리차 냄새 외엔 아무런 냄새도 없었고, 갑자기 그러고 있는 내가 처량하게 느껴지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냄새나면 앞으로 갖고 다니지 마!"라고 소리치기 시작하여, "아빠가 니들 노예냐!" 며 말도 안 되는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순전히 내 자격지심 때문에 얘들이 큰 잘못이나 한 것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이런 행동은 잠재의식 속에 내가 이렇게 해도 아이들은 꼼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일종의 폭력이었다. 얘들은 아무 생각 없이 냄새가 난다고 한 것인데, 나는 마치 갑 질을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끓여 준 된장찌개를 먹으며, 엄마가 퐁퐁세제를 찌개에 타서 줬다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나의 이런 애정결핍에서 오는 피해의식은 내 잠재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듯하다.

아내가 잠시 집을 비워도 이렇게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웠고 아내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생각보다 일찍 들어온 아내가 아이들을 수습하고,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나니 마음이 풀렸다. 저녁 늦은 시간이 돼서야 아이들에게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바로 규은이 방에 들어가 사과를 했고, 여은이는 불을 끄고 자고 있어 살짝 깨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아빠가 갱년기가 온 것 같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했다.

나 스스로 돌아봐도 요즘 너무 작은 일에 삐지고 화가 난다. 자신감과 모험심이 많이 없어졌고, 머리도 답답할 만큼 잘 돌아가지 않는다. 갱년기 증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제 그런 나이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상이 아닐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감정 표출을 조심해야겠다.


아내가 없는 틈을 타 이렇게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내가 참 대단하기도 하다.

자녀들은 우리 부부의 열매이니 그 어떤 잘못을 해도 다 내 탓인 것이다. 그 부족한 점을 감싸고 다독여 주고 좋은 점만을 칭찬하며 살아도 충분하다. 내가 많은 단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나를 그렇게 키워주신 부모님 덕분인 것처럼 말이다. 갱년기가 인생의 슬럼프가 아닌 부족한 나를 발견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위로해 본다.

이전 20화쫌생이 자격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