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전투

결혼 19년 차 일기

by 일로

크리스마스이브 전투 2019년 12월 24일


오늘은 아침부터 아내에게 짜증을 냈다.

아침에 엄마들 모임이 있다고 운동하고 일찍 오라고 해서 시간 맞추어 서둘러 오고 있는데 재촉하는 카톡이 왔다. 운동하면서도 내내 시계를 보며 늦지 않게 가고 있는데 답장을 하려니 귀찮았다.

운전하다 허둥대다 보니 오타가 났고 다시 묻는 카톡이 오자 짜증이 났다.

알아서 가고 있는데 꼭 10분 전까지 오라는 내용을 보니 뭔 일인가 싶기도 하고, 약속 장소까지 차로 5분도 안 걸리는데 왜 그러나 싶었다.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내려오라 전화를 했고, 차에 탄 아내에게 왜 자꾸 카톡을 하냐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아내가 당황한 얼굴로 잊고 있을까 봐 보냈다며 상기된 표정을 짓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는 큰 딸 학교 급식검수 데려다주며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던 자상했던 남편이 갑자기 돌변했으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건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즘 내 처지에서 오는 자격지심이 발동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백수로 지낸 지 한 해가 다 가고 있다는 생각과 내년에도 뚜렷한 대안이 보이지 않자 슬슬 불안한 마음에 자존감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못 미더운 남편을 확인하는 것 같은 아내의 행동에 사춘기 소년처럼 짜증이 나니 말이다.


아내는 방에서 마루에 있는 나에게 카톡을 할 정도로 아주 소소한 것도 카톡을 주고받으며 하루종일 붙어있다. 종일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 침대에서도 손이라도 잡고 있으려고 더듬거리다 보니 아내는 나에게 찰거머리라 놀린다. 그러던 사람이 느닷없이 왜 카톡을 보냈냐고 화를 냈으니 내가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것도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말이다.


가족들과 즐거운 저녁 시간을 위한 궁리는 못할망정, 아침부터 모임에 가는 아내의 기분을 망쳐 놓았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아내가 오후에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오늘 모임에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자 그때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오전 전투를 마무리 짓고 고스톱을 치고 있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고, 여은이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대치동 학원을 끊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고스톱을 치다 말고 침착하게 학원에 전화해 상담을 하고 아이들 밥을 차려줬다.


아이들을 스터디카페에 데려다준 후 아내가 필라테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9시경 아내가 돌아오기가 무섭게 벌려 놓은 고스톱 판을 다시 시작했다.

실랑이와 억지를 부리는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승리하며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를 장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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