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9년 차 일기
반전의 반전 2019년 12월 9일
오늘은 비 오는 금요일이어서 그런지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지만 나가지 못했다.
특히 단짝이 오랜만에 보자 했는데도 거절해야 했고, 동창 번개모임과 친구 설득 전화에도 나갈 수 없었다.
아내가 친구들 만난다며 나보고 집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있으라 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으나 일 년에 한 번 나가는 아내 망년회를 위해 그 정도도 못하냐는 아내 말을 꺾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인 아이들을 내가 집에서 뭘 지키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오히려 자기가 나가니 나도 친구들 만나러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제저녁때 오늘 망년회 간다는 얘기에 나도 친구들과 약속을 잡겠다고 하니 펄쩍 뛰었다.
한 사람이라도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자신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나보고 나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지난번 당신도 내가 친구들 만나러 갈 때 친구와 새벽에 오지 않았냐며 항의 하자, 그날의 진실을 얘기하며 내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바람에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내가 아내가 바람났다고 일기를 썼던 지난달 18일 금요일에 사실 자신은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날 갑자기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해, 거짓말로 자신도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고 아이들과 입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날 나와 비슷한 시간에 나간다고 준비도 했고 명동에 간다며 지하철도 알아봤는데, 그것이 다 연기였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됐든 나는 아내의 늦은 귀가를 의심하며 일주일 정도 삐져있었기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내 감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는 미정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 찜찜했던 일이 사라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밤새며 놀고 있을 때, 자신의 감정도 똑같다며 나에게도 그런 심정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내가 항상 같은 친구들과 놀고 있다고 해도, 밤새고 오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최소한의 취미 생활이라 항변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아내의 감쪽같은 연기에 속아 며칠 동안 말도 못 하고 골골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속으론 무척이나 통쾌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아무리 친구가 절묘한 타이밍에 연락을 해왔어도, 아내의 부탁을 뿌리치고 나가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아내가 외출을 하고 아이들에게 그날의 진실을 물어보니, 엄마가 집에 있는 증거 동영상까지도 자신들과 찍어 놓았다며 재미있어했다. 아이들에게 의심 많은 못난 아빠의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너무 완벽하게 속아 며칠 동안 꽁해 있던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오늘은 아내의 또 한 번 반전에 무장해제가 되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안방에 갇혀 티브를 보면서,
과외하는 여은이와 잠자는 규은이를 감시하고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