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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Sep 05. 2024

아내와의 대화

결혼 20년 차 일기

아내와의 대화    2020년  2월  4일


 오늘은 오후에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아내와 남양주 팔당 제빵소란 카페에 갔다.

평일이지만 사람들로 붐볐고, 다행히 좋은 자리에 앉아 시원한 강물을 바라보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사실 이번 주 일요일에도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던 터라 어제까지도 조금은 서먹했다가 오늘에야 겨우 자연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가 그 주제는 피하고 이런저런 평상시 수다 재료들을 가지고 실컷 이야기를 하고 일어설 즈음이었다.

아내가 일요일 날 내가 또 간다고 해서 너무 서운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완벽주의를 내려놓으려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자신의 남편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겠다는 얘기였다.

그 말에 나는 그날 내 심정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 그렇게 다툰 후 연휴기간 친구들이 보자고 했으나 거절했던 사실과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열흘 만의 외출인데도 맘 편히 갈 수 없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가기 직전까지 아내 눈치를 보며 잠깐 갔다 온다고 도망치듯 집을 나오는데 아내가 또 원망스러워졌다.

도대체 나에게 뭘 어쩌라는 건지 이렇게는 하루도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많은 절제를 하면서 최소한 내 숨 쉴 구멍을 찾는 것인데, 이것마저도 저렇게 못마땅해한다면 더 이상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어떤 아내도 남편이 친구들과 카드를 한다면 좋아하지 않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대학 친구들과 20년 넘게 만나서 노는 놀이일 뿐 도박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술, 낚시, 게임, 골프를 좋아해도 최소한 이것 이상의 비용과 시간을 쓸 것인데, 나름 가성비 좋은 유일한 취미인데 이것마저도 이해해 주지 않는 아내에 대한 서운함이 크게 다가왔다.


 아내는 지난주에 싸웠는데 또 가냐며 서운해했고, 나는 지난주에 그렇게 이해해 달라고 했는데 또 서운해하냐며 더 화가 났던 것이다. 아내가 먼저 말을 꺼낸 김에 나도 그때의 심정을 토로할 수 있었다.

그러다 아내게게 이런 말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도 이렇게까지 싸우고 당신이 미워지는데, 만약 내가 진짜 어떤 실수를 한다면 아마도 우린 바로 이혼해야 될 것 같다고..

스스로 이렇게 당당한 일에도 당신 눈치를 보면서 힘들어한다면, 진짜 큰 실수를 했을 땐 당신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이다.

아내도 큰 처형의 이혼을 예전에는 정말 이해 못 했는데, 이제는 조금 언니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부부 사이여도 이혼이란 것이 그렇게 멀게 있지 않음을 슬프게 인정해야 했다.


 아내에게는 미안했지만 내 맘 속 깊은 곳에 있었던 아내에 대한 감정을 솔직히 얘기하고 나니 후련했다.

내 사랑이 깊지 못하고 성격이 못나서 나이가 들수록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 정신상태가 걱정되기도 했다.

어쩌면 남자들은 자기 아내가 강하다고 느끼면 본능적으로 이 여자에게 자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자신의 마지막 수컷으로서의 자존감을 인정받을 수 있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대화는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며 서로에게 주고받는 탁구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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