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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Sep 23. 2024

집을 부수다

기억나는 부부싸움들

2. 집을 부수다


 결혼 5주년이 막 지난 어느 날이었다.

며칠 동안 부부 싸움을 한 후 화해를 하고 교회를 다녀온 일요일 아침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다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또다시 언쟁을 했다.

아이들과 아내를 놀이터에 내버려 두고 혼자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들어와 침대에 누워있는데, 한참 지나도 아내가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부엌 베란다를 통해 놀이터를 내다보니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돌아버렸다.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나는 미쳐버렸다.

나 혼자 남겨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사실에 큰 불안을 느낀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 버스 정류장에 혼자 남겨지고 모두 떠나버렸던 트라우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티브를 향해 리모컨을 집어던진 이후부터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액자고 시계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거실에 유리 조각들이 수북이 쌓이고 내 발에 피가 나기 시작해서야 내 폭동은 멈췄다.


 방으로 기어가 누워있는데 손이 떨리고 숨이 차 왔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나와 보니 겁이 덜컹 났다. 아이들이 보면 안 될 것 같아, 신발을 신고 청소를 시작했다.

치워도 치워도 유리조각들이 계속 나왔고, 대충 눈에 보이는 것들만 쓸어 담고 현관을 나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환한 와이프 얼굴과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유리 조심하라는 말을 던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날 저녁 친구를 불러 술을 먹으며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자존심이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고.."  

그러자 그 친구 하는 말 "똥구멍 빨아 주는 사이에 무슨 자존심이 있냐.."

이 말 한마디에 나는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어 백기 투항을 고했다.


 이 날 사건 이후로는 적어도 내 자존심을 들먹거리는 부부 싸움들이 잦아졌다.

무엇보다도 나를 안심시킨 건, 그날 저녁 집 안을 그렇게 망가뜨리고 집에 들어갔을 때 아내의 모습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평온하게 나를 맞아 주었던 것이다.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고 무서워 도망을 갔거나, 나에게 미쳤냐며 싸움을 걸어올 만도 했는데 말이다.

깨끗이 청소를 해놓고 아이들과 조용히 거실에 누워있는 아내가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사실 그날 이후로는 큰 싸움이 거의 없어졌다.


 이 시절 싸움의 발단은 다 내 도박 병 때문이었다.

총각 시절 형과 사업을 할 때 2년 동안 하우스를 다니며 포커 도박을 했던 전력이 있다.

결혼 후에도 부동산 직원으로 있을 때 생활비를 번다는 명목으로 도박을 하고 늦게 들어온 날이 많았다.

그즈음 PC방에서 일반인들과 실시간 포커게임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아내도 독박 육아에 지쳐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퇴근 후 집 앞 PC방에 잠깐 가서 돈도 벌고 스트레스도 푸니 얼마나 좋으냐며 아내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아내는 돈도 필요 없다며 왜 도박을 하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싸우다 화해를 하고 예배를 보고 돌아오다 일이 터진 것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백번 내가 잘못했으나, 그때는 아내가 세상물정 모르는 벽처럼 느껴졌다. 내가 심한 갑질을 했고 아내는 많이 참고 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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