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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십에 읽는 흑역사

#15.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by Peregrine

2021년


미국에서 살면서도 한국을 자주 방문하려고 노력을 해도 5년에 한 번 꼴로 얼굴을 볼 기회가 생겼다. 가족이라도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 조카들은 눈에 띄게 자라나서, 밖에서 지나치다 마주쳐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다른 가족들이 우리 아이들을 볼 때면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이란 말이 있지만, 단순한 나란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무덤덤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해외 타지에서도 살 수가 있었나 보다. 엄마와는 그리 자주 연락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간혹 전화연락을 하였는데 최근 들어 청력이 약해지셔서 그런지 대화가 원활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주 하지 않으시던 말을 하셨다.


“언제 한 번 나와라. 보고 싶다.”


언니들과 오빠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둘째 진혁이가 8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면, 가을학기에 테니스부 시즌이 있어서, 방과 후 곧바로 팀연습을 하고 한 주에 2-3번의 게임도 있으면 집에 늦게 돌아오는 관계로 나의 뒷바라지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10월에 2주 동안 나 혼자 한국을 방문하고자 하는데 한국 사정을 물어보았다. 코로나가 완전히 진정된 상황은 아니어서, 한국에 입국한 뒤 2주간의 자가격리가 필요한데, 한국 체류 기간 동안 직계가족을 방문하면, 그 직계가족의 집에서 자가격리를 할 수가 있었다. 어차피 부모님을 뵈러 가는 것이라, 부모님 집에서 자가격리를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5일 후, 그리고 출국하기 48시간 이내에 코로나 검사를 받아서 음성결과가 나와야 했다. 양성이 나오면 출국이 불가능하므로 감염이 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을 하였다.


엄마의 연세는 86세였는데 정갈하고 아직 직접 살림을 하셔서 내가 방문을 해도 엄마가 음식을 준비하시고 나는 설거지를 하였다. 이미 제사는 새언니에게 물려주셔서 명절이 되어도 음식 차리기 등도 많이 간소화되었는데, 아무리 딸이어도 엄마로서는 신경이 많이 쓰이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뜨개질을 하셨고, 엄마는 나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셨다. 막내이모의 이모부, 엄마에게는 제부가 돌아가셨는데 이모가 엄마에게 알리지 않으셔서 서운하셨다고, 또 그 외에 이전에 서운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셨다. 한 에피소드 당 서너 번씩은 들은 것 같다.


엄마, 아버지와 한방에서 함께 자면서 하루하루를 음미하였다. 아침이 되면 엄마는 예약이 되어 있는 내과에 다녀오시고, 나는 일산장에 가서 목욕타월과 머리핀도 사 오고 하였다. 내과에 다녀오시더니 의사분이 엄마에게 서맥 소견이 있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하였단다. 그럼 그건 심각한 건 아닌지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 아닌지 물었더니, 엄마가 알아서 하시겠단다. 아마도 내가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가 보실 계획인가 보다 하였다. 그리고 작은언니에게 엄마가 서맥이라고 하는데 괜찮은지 물었더니,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가 보다고 하였다.


방문기간도 2주로 짧기도 하고 코로나로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동도 제한되어 이번 방문기간에는 시댁은 방문을 못 하노라고 미리 양해를 구하였다. 하지만, 찾아오는 어른들은 집 근처에서 만났다. 그날도 형님가정을 뵙고 집에 들어왔는데, 엄마가 거실에서 비스듬히 누워 계셨다. 보통 텔레비전을 보시면 소파의자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 계시는데 자세가 이상하였다. 옆에서는 아버지가 뜨개질을 하고 계셨는데, 엄마에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신 것 같았다.


“아버지, 엄마가 언제부터 이렇게 누워계셨어?”


“어?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는데!”


나는 엄마의 눈동자를 보았다. 눈을 감은 것은 아닌데 검은 자는 힘없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나는 엄마를 살살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는 천천히 대답을 하셨다.


“어…”


“엄마, 괜찮아?”


“어, 조금 어지러워서.”


“언제부터 어지러웠어?”


“괜찮아, 이렇게 좀 누워있으면 나을 거야!”


엄마의 눈동자가 아무래도 께름칙하였다.


“아버지, 119를 불러야겠는데.”하며, 전화기로 119를 눌렀다. 엄마는 누우신 채로

“그냥 내버려 둬, 가만히 있으면 돼.”하고 만류하셨다.


“어, 알았어! 119에 물어봐서 괜찮은지만 확인해 볼게.”


“저, 여기 저희 엄마가 언제부터인지 기운 없이 누워계셨는데요, 얼마 전 병원에서 서맥진단을 받으셨어요. 119를 불러야 하나요?”


“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86세 되세요.”


“병원에 가야 돼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응급실이 여의치 않으면 입원하는 병원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보호자 분 한 명도 같이 구급차에 동승하셔야 되고요, 20분 내에 도착할 겁니다.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가니까 보호자분도 준비하시고요.”


나는 주소를 알려준 뒤, 현관입구에 있는 의자와 잡동사니를 치웠다. 그리고 나와 엄마가 필요한 물품들을 간단히 챙기고 아파트 입구에 가서 기다렸다. 20분도 채 안되어, 응급차가 도착하여, 내가 집안으로 안내하여 엄마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일산병원으로 향하였다. 구급차 안에서 엄마의 손을 잡아주었다. 깜짝 놀랐다. 엄마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집에서는 엄마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불안하였는데, 응급실에 도착하고 나서는 의사들이 돌아가며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 다른 검사를 하며 엄마를 살펴주니까 마음이 한결 놓였다. 집에서 대충 챙겨 온 엄마가 드시는 약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더니, 전해질 수치가 낮으니 모든 약은 중단하고 엄마의 상태에 따라 새로운 약을 처방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침상의 어르신들은 정말 맥박수가 엄청 높은데 엄마는 맥박수가 낮았다.


기다리면서는 간혹 가다 다시 엄마의 손과 발을 만져보았다. 아직도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오빠에게 알린 모양이다.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오빠와 새언니가 병원까지 와 주었고, 필요한 물건을 알려달라고 하여 수고스럽지만 도움을 청했다. 그 뒤로는 오빠가 형제들 카톡방에 엄마의 상황을 알렸다.


밤늦게 레지던트 선생님이 오셔서, 갑상선기능저하증으로 전해질이 잘 생성이 안되어 심장에 자기장 형성이 잘 되지 않아, 서맥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한 진단은 아침에 과장님이 오시면 알려주실 것이란다. 혹시 가족력으로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있는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저요, 제가 한 5년 전에 갑상선기능저하증 진단을 받아서 호르몬제를 먹고 있는데요.”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한테 미리 알려드릴걸. 갑상선이 그런 기능을 하는 줄은 나도 몰랐다. 그냥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있으면 살이 찌고, 변비가 있고, 피곤을 느끼는 정도로만 알았다.


환자들의 이름과 담당의사의 이름을 보여주는 디지털 전광판에 엄마의 이름 옆에 심장내과 과장님의 이름이 그제야 입력되었다. 엄마의 상황은 계속 카톡으로 내가 생중계해 주었고, 큰언니가 다음날 아침 일찍 아버지에게 가고, 신발 신고 다녔던 현관입구를 청소해 주기로 하였다. 오빠가 나와 교대하여 엄마 곁에 있고, 나는 병원입구에서 출국 전 마지막으로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낮잠을 자고 다시 오빠와 교대하여 엄마의 곁으로 왔다. 엄마의 손과 발은 아직 차가웠지만 그래도 이승의 냉기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도 병실이 정해지지 않아 음식을 먹는 것이 금지된 응급실에서 부득이 아침식사를 하셔야 했기에 냄새가 강하지 않은 호박죽을 데워서 드렸다. 그리고 가글로 입가심을 해드리고, 조금 크지만 새로운 마스크로 바꿔드리고, 이제 가봐야 한다고 알려드렸다.

누우신 채로 엄마가 뭐라고 말씀하시기에, 귀를 가까이 다가갔더니, 냉장고에 순두부 있으니까 해서 먹고 가라고 하셨다. 그러마고 하였다. 눈물을 흘리셨다. 손을 꼭 잡아드리고 큰언니와 교대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날 담당의사 선생님의 결정으로 심장에 박동기를 삽입하는 수술이 결정되었다.


그리곤, 4개월여 만에 엄마는 이 세상을 떠나셨다. 불과 나보다 한 세대 앞선 엄마이지만 참 어렵고 서러운 세상을 살아오셨다. 수술 이후 몸이 편치 않아 고생하시면서도 엄마는 전화통화에서는 그저 괜찮다고만 하셨다. 하지만 언니는 정신은 맑은데 당신 몸이 쇠약해져 마음과 몸이 불일치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하였다.




아직 쌀쌀하지만 그래도 거스를 수 없는 봄이 오는 3월이 되었다. 엄마의 기일에 마음도 몸도 둘 데가 없었다. 장례식도 못 갔고, 첫 기일도 못 갔고,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개뿔이다. 내가 어리고 자라날 때, 내 곁을 지켜주고 키워준 엄마가 정말 몸이 편치 않아 내가 필요할 때, 나는 일정에 맞춰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곁에 있어주는 다른 삼 남매에게 나는 늘 할 말이 없다.


나도 모르게 통화 중에 계속 엄마에게 하던 말이 있었다.


“엄마, 손이 너무 차가웠어….”


엄마는 아무 말도 없으셨다. 그런데 깨달았다. 엄마의 손이 차가울 때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엄마의 존재가 같은 하늘아래에서 조차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작은 체구로 엄마 능력 이상으로 살아오신 그 소중한 존재를 기리니 먹먹해졌다. 다음 생에는 내가 더 가까이 마음만큼 지척에서 엄마랑 같이 있을게. 사랑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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