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무식과 용감 사이
2006년
진우가 만 3세가 되었다. 아시아계 남자아이가 나중에 자라서도 자신감을 갖고 또 체력적으로나 자기 자신은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태권도를 가르치기로 하였다. 당연히 진우에게 의견을 물어본다거나 아이의 취향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아이의 의견을 묻기에는 너무 어렸고, 또한 어리기에 무엇이든 소개해주는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것이라 믿었다.
조사를 해보니 좋은 곳이 마침 있었다. 1년 동안 등록을 하고 자동이체를 하면 수업료가 할인되어 주 3회 수업 듣고 1년에 900불이며, 도복도 공짜로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우도 데리고 아빠와 셋이서 등록을 하고 다음 세션에 진우는 도복을 입혀서 갔다. 진우가 태권도를 시작하기 전에 스트레칭을 하는 것부터 사진도 많이 찍었다.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음 세션에 가기 위해 진우를 준비시키려는 데 진우가 한사코 태권도에 안 가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말하지 않고, 무조건 가지 않겠다는 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딱 한 번 태권도에 가고는 그만이었다.
한 달쯤 지나서, 75불이 은행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이게 뭔가 싶어 봤더니, 태권도에서 자동이체로 결재가 된 것이다. 태권도장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 아이가 더 이상 태권도를 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태권도를 취소하겠노라, 그러니 환불을 해달라고 하였다.
오, 진우가 태권도를 하고 싶지 않다니 아쉽다. 하지만 등록 15일 이내에 취소를 했었어야 했는데 부모님이 취소하지 않았으니 안타깝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자동결제는 다른 회사에 용역을 준 것이라, 자신도 권한이 없다.
때로 나는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용감은 실제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잘 알아서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잘 알지 못하여 여러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파악하지 못한 즉, 무지함에서 오는 용감일 수 있겠다. 저렴한 가격에 아이에게 태권도를 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꽂혀, 진우가 태권도를 좋아하는지 시험 삼아, 몇 차례 시도해 보고 좋아하면, 그 후에 1년 수강을 고려해 보아도 되었을 일이다. 더욱이, 등록할 때 서명한 작은 글씨를 빼곡히 담은 등록서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 보았어야 했다. 전화를 끊고 계약서를 읽어 보니, 계약일로부터 15일 이전에 해약을 해야 하고, 일단 해약기간이 지나면, 자동결제를 처리하는 회사는 제3의 회사로 그들의 기준은 신체에 변고가 있거나 50마일 이상의 거리로 이사를 가서 더 이상 학원을 다니기 불가능한 경우에만 해약이 된다는 것이다.
주소를 가짜로 변경해 볼까? 내가 몸이 아파서 운전을 할 수 없어서 진우가 태권도 학원에 갈 수 없다고 할까? 나의 잘못이 분명하여, 남편에게는 말도 못 하고 정말 일주일을 끙끙 앓았다. 유학생 신분으로 900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정말 큰 맘먹고 결정한 최초의 사교육 나들이였는데, 우울증이 걸릴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남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1년 동안은 매달 자동이체로 금액이 빠져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 진우의 과외활동은 본인이 싫다고 하는 것은 절대 강요할 수 없었다. 진우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우연히 그때 태권도를 거부하던 이야기가 나와서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너무 무서워서!”하였다. 기합소리와 작은 남자아이도 발차기하는 모습이 든든하고 다부져 보여 좋았던 나와는 달리 어린아이의 눈에는 공격적이고 싸우는 것 같아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2006년 9월은 둘째의 출산 예정일이었다. 6월에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하는데, 진우도 참여하기도 하거니와 자원봉사자가 많이 모자라서 나에게도 자원봉사를 해달라고 어린이 교역 담당자 카렌이 부탁하였다. 배가 산만해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계속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기도한다기에 결국은 자원하기로 하였다.
여름성경학교에서 나는 진우와 같은 반을 담당하였다. 나와 함께 봉사하는 교사는 우리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자신의 딸아이와 같은 반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5일간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는데 만 4세 반을 맡았다. 우리 교회에 다니지도 않고 낯선 학급에 온 아이 중 한 명이 아침마다 울면서 적응하기 힘들어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주로 맡았고, 첫날에는 유아교사로서 습관처럼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셋째 날부터는 잘 적응을 하여, 여름성경학교는 무사히 잘 마쳤다.
문제는 내가 탈이 났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배에 통증이 느껴졌다. 극심하지는 않지만 잊히지 않는 통증이라고 해야 하나? 하루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앓았다. 결국 응급실에 가서 복통을 호소하니, MRI를 찍었다. 체내 태아에는 무해한 약을 먹어서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통증의 원인은 파악해야 했다. 검사결과는 오른쪽 난소에 9센티미터 지름의 물혹이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통증을 유발하는 원인인 것으로 추정하며, 보통은 수술로 제거해야 하는데 임신 중이므로 통증을 관리하고 출산 후 추이를 지켜보고 혹을 제거하자고 하였다.
진우와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서 일반 병실로 옮겨 하루를 지냈다. 별로 할 일 없이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데 임신 말기에 무리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면 굳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복통의 원인을 정확하게 연관 지을 수는 없지만, 여름성경학교에 무리하여 자원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이번에 그냥 ‘미안하지만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이번에는 자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거절하지 못하여 오히려 내 아이의 안전을 위협한 것은 아닌가? 내가 무지하고 현명하지 못하여 그 대가를 아이가 치르는 것은 아닌가? 깊은 후회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