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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읽는 흑역사

#14. 코로나 19 봉쇄령

by Peregrine

2020년


2019년 말부터 한국에서는 중국 우한에서 비롯된 코로나 발병으로 시끄러웠다.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자제하였다.


미국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려왔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남부 테네시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마스크를 쓰는 사람은 자신이 코로나에 걸렸다고 자인하는 것이거나 정치적으로 진보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테네시에는 골짜기가 많아서 큰 도로를 지나 주택가로 들어가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로가 많아서 겨울이 되어 눈이 조금만 와도, 학교버스가 마을 곳곳을 다니기에는 도로상태가 좋지 않아 휴교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20년 초 에는 폭설보다는 오히려 A형 독감이 유독 유행하였다. 그 덕에, 상당수의 교직원과 학생들이 아파서 결근이나 결석을 하여 임시 휴교를 하였다.


뉴욕에는 코로나 발병으로 감염자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엄청난 속도로 감염자수가 늘어나고 매일 뉴스는 지역별로 감염자수를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급기야 3월 초가 되어 봄방학을 맞이하기 전에 코로나로 인한 1차 봉쇄령이 내려졌다. 장보기와 병원방문 등 가장 기본적인 목적 외에는 가능한 외출을 자제하도록 권고하였다.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권장되었다. 모든 학생에게 크롬북을 배포한 다른 주의 학교에서는 온라인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고 하였는데,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교육청에서는 온라인수업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공립학교에서는 모든 학생의 가정에 인터넷이 설치되어 있고, 개인용 컴퓨터나 타블릿 장비가 갖춰지지 않으면 형평성에 맞지 않아, 온라인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교육과정의 진도는 나갈 수가 없고 그동안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자료를 이메일로 받았다. 복습 자료의 분량도 많지 않고, 실제로 배운 내용을 살펴보는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사실상 그냥 휴교를 한 상황이었다. 모든 업무도 자택근무로 전환되었다.


2018년부터 남편은 인디애나로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 아이들이 전학을 가면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서, 큰아들 진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2020년 6월까지는 테네시에서 나와 아이들이 지내고, 남편은 아파트에 거주하며 인디애나에서 지내고 있었다. 남편은 3주 동안 인디애나에서 일을 하며 지내고 2주는 테네시에서 지내면서 재택근무를 하였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인디애나에서 9시간 동안 운전하여 오는 것이 위험하여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 지내고 인디애나로 돌아가면 3월 중순에나 테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기러기 가정으로 살아온 지 딱 두 번째로 맞이하는 겨울에 전례가 없는 코로나 감염으로 1차 봉쇄령이 내려졌다. 각 주에서 다른 주로 이동하는 것에도 제한이 있어서, 남편은 크리스마스가 끝나고도 계속 테네시에 머물러야 했다.


그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은 가족 모두가 이렇게 24시간 한 공간에 머물기는 처음이었다는 점이다. 남편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장을 보러 다녔다. 조금씩 물건을 사들였다. 화장실 휴지, 항균 물수건, 20파운드 밀가루 포대, 기타 등등.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조금씩 사들인 물건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여갔다. 다른 건 그래도 이해가 가는데, 밀가루는 조그만 용량 하나를 사도 돈가스, 칼국수, 수제비 등을 해 먹어도 꽤 오래 먹는데, 저 큰 용량을 어찌하려는 속셈인지... 애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곧 이사를 가야 하는데, 이런 것들도 다 짐인데 싶었지만, 남편의 눈에는 ‘생존모드’라는 빛을 내뿜고 있어서 내버려 두었다. 세상에 회오리가 몰아치자 고개 숙이고 저자세로 숨죽이고 이 비바람이 내 머리 위로 비껴가기를 고대하면서 마음에 응어리진 생각이 많아졌다.


진우가 지원한 대학들로부터 하나씩 던져지는 합격과 불합격 소식으로 마음의 추가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던 차였다. 본인이 거주하는 곳의 주립대학이 아닌 타 주의 주립대학은 등록금 비율이 적게는 두 배에서 세 배까지도 차이가 났다. 사립대학은 원래 학비가 비싸지만 장학금이나 재정지원을 잘해주는 학교도 있어서, 오히려 타 주 주립대학보다는 학비가 저렴한 곳도 있었다. 다만 정확하게 어떠한 사립대학이 재정지원을 잘해주는지, 타 주의 주립대학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장학금을 많이 주는 학교도 있어서, 아이의 상황에 맞추어 지원할 학교를 조언해 주는 진학서비스를 12학년을 시작하기 바로 전인 6월에 받았었다. 아이의 이력서를 준비해서 아이와 동반하여 우리 부부는 애틀랜타까지 가서 입시 진학 상담사 부부를 만났다. 부부 역시 자신들의 아들을 미시간대학교에 5만 5천 불의 장학금을 받고 입학시켰다고 하였다. 아이의 직업선호도 조사 등 오랜 시간 상담을 하고 왔는데, 타 주의 주립대학이던 사립대학이던 재정지원을 잘해주는 엔지니어링 전공 학교를 부탁하고 왔다.


8월이 될 즈음, 8곳의 학교를 추천해 주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하고 진우에게 학교 명단을 알려주었더니 진우의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합격해도 가고 싶지 않은 학교가 있었고, 자신이 지원하고 싶은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의 이름은 없었다. 진우는 상담사에게 이밖에 자신이 관심이 있는 다른 학교도 가능할지를 물어보았다. 상담사의 답변은 진우에게는 조금 상향지원이 될 수도 있고, 혹여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타주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이나 재정지원이 거의 없는 학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상담사가 추천한 대학들에 지원을 하였다. 대학을 지원하는 과정 내내 진우는 그다지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네 식구가 아침에 눈을 떠서 간단하게 조식을 먹고 모두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가 저녁식사를 하며 하루를 지낸 이야기를 나누던 생활에서, 이런 유례없는 24시간 밀착된 공동생활에 서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매끼 함께 식사를 하면서는 서로 나눌 것도 별로 없고, 서로를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살고 있는 집도 팔기 위해 3월 말에 부동산 시장에 내놓은 상황이어서, 잠정 구매자가 집을 보러 오겠다고 예약을 하면 그 1-2시간은 네 식구가 집을 비워줘야 했다. 카페나 서점 등도 모두 문을 닫은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공원에서 산책하며 시간을 때워야 했다.


나 스스로도 생각이 많아졌다. 진우의 대학지원 과정에서 왜 정작 당사자인 진우는 흥이 나지 않는 걸까로 골똘하였다. 아마도 상담사가 볼 때, 우리의 요구사항 중 진우보다는 물주인 나의 의견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대학교 리스트를 준 것은 아닐까? 상담사가 준 리스트에는 없어도 또한 재정지원이 거의 없어도 진우가 지원하고 싶은 대학에도 지원해 볼 걸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루는 내가 용기를 내어 진우에게 말하였다.


“진우야, 생각해 보니까 재정지원이 적어도 네가 원하는 대학에도 지원했어도 됐을 텐데, 너무 상담사가 준 리스트에만 지원해서 미안해.”


“그니까, OOO는 돼도 안 갈 건데 왜 지원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 마치 봇물이 터진 듯이 그동안 쌓인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진우에게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아야 내 마음이 편하겠기에 사과를 한 것인데, 생각보다 진우의 폭발적인 반응에 나 역시 내심 많이 놀랐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회가 닿는 대로 진우가 불평하는 것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내 돈 주고 서비스받고, 저 잘되라고 발품 팔은 거였는데, 나는 왜 늘 죄인 같은 기분일까?




하루는 식사를 하면서 서로 얘기하다가 진우가 말하였다.


“내가 만약 아빠랑 결혼했으면, 2년 만에 이혼했을 거야.”


한동안 모두 조용해졌다. 불만이나 짜증을 내면서가 아니라 오랜 관찰과 고려 끝에 담담하게 내뱉은 진우의 진심에 한편으론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맘, 알지!’ 하는 공감도 들었다. '이때다!' 싶어서, 내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서 나의 턱을 받치며 말했다.


“나, 나아! 내가 아빠랑 20년을 같이 산 사람이야!”




봉쇄령은 4월 말에 해제가 되었다. 해제가 안되어도 사람들은 삐죽삐죽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아줌마들 대부분 스스로 머리에 꽃을 꽂지 않고자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기간에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사례가 많았고, 장시간 머무는 집을 수리하거나 개조하는 가정이 많았고, 재택근무가 장기간 지속될 것이란 예측에 저금리를 이용하여 도시 외곽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집값은 치솟았고, 이혼하는 가정의 수가 늘어났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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