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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읽는 흑역사

#10. 어디라고 기어와?

by Peregrine

2000년


2000년에 유학을 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남편은 생의학공학에, 나는 유아교육을 지원하였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학교로 입학허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결국, 남편이 입학한 학교로 먼저 갔다가 거기서 나도 다시 지원을 하여 다니기로 하였다. 학교는 버지니아주에 있는 리치먼드라는 주도인데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었다.


나는 매일 남편과 함께 학교에 가서 책을 읽고, 토플과 GRE를 공부하였는데, 생활비도 없는데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데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도 당신이 공부를 하실 때엔, 유학생이라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선 풀타임 학생신분을 유지하면서도 늦은 밤까지 생활비와 학비를 위해 목사님 부부 모두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고 하였다. 우리도 학비는 그렇다고 쳐도, 서른이 넘어서 온 유학인데 생활비마저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였다.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를 한다고 영어점수가 눈에 띄게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돈을 벌어야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비자상으로 유학생의 배우자로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 미국 경기는 좋았고, 일자리는 많은 데 사람은 모자랐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할 일은 많았다. 우선 주일에 예배 참석인원이 100여 명 정도 되는 한인교회에서 수요예배가 있기 전에 예배당과 식당을 청소하고 예배시간이 되면 수요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 교인들이 모여하는 다과 및 교제에는 참여하지 않고, 곧장 학교로 가서 남편을 데리러 갔다. 토요일에는 남편과 함께 일요일에 있을 예배를 위해 교회 전체를 청소하였다.


그리고 뷰티서플라이 (Beauty Supply)에서도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과 토요일 하루 10시간씩 일을 하였다. 시간당 7불 50센트를 받았는데, 나는 불법으로 일을 하는 것이라 현금으로 2주에 한번 주급을 받았는데 세금을 떼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생활비로는 충분하였고, 약간의 저금도 가능하였다. 그때 모은 돈으로 남편은 여름방학 동안 어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 흑인여성이 주된 고객인데, 흑인전용 미용실 옆에 가게가 자리하고 흑인들의 가발, 가짜 부분머리와 미용용품을 파는 곳이었다. 흑인들 머리는 강하지 못해서 머리를 기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미 헤어스타일링이 되어 있는 부분머리를 붙이는 것이다. 진짜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든 부분머리는 붙이고 머리를 감을 수가 있지만, 가짜섬유로 만든 부분머리는 감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한번 가짜머리를 부착하면 한 2주 정도는 머리를 감지 못한다. 머리를 감아야 할 때, 뷰티서플라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부분머리를 구입해서 옆가게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고 헤어스타일링을 하는 것이다. 실력 있는 미용사가 가게 옆 미용실에 있으면, 그 미용사의 손님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부분머리도 불티나게 잘 팔려서 우리 가게의 매상도 덩달아 올라갔다.


뷰티서플라이 사장님은 한국인으로 나와 또래였고, 가게 왼쪽이 미용실이라면 오른쪽에는 식품점이 있었다. 식품점의 주인도 우리 사장님의 부모님과 남동생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사장님의 아버지는 주로 고기류를 다루시고, 어머니는 물건을 정리하고 남동생은 계산대를 맡았었다.


하루는 사장님이 옆의 식품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물건을 진열하고 정리하고 있는 나보고 계산대를 맡으라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식품점에 왔던 흑인 손님이 계산대에서 지불하는 척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맥주 팩을 들고뛰어 도망갔다. 남동생이 본능적으로 도망가는 흑인을 쫓아서 달려 나가자,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우리 사장님 보고 같이 따라가라고 연락을 준 것이다. 물건을 들고 도망가는 흑인을 보고 화가 나서 너무 멀리 혼자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흑인이 뒤돌아 서고 다른 일행이 주변에 숨어 있다가 나오면서 오히려 일대 다수로 대치되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뷰티서플라이나 식품점은 주 고객이 흑인이고 차량을 소유한 흑인이 많지 않아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에 상점이 위치해야 하므로 당연히 흑인거주지역에서 장사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교민들이 주로 하는 사업이 식품점, 뷰티서플라이, 건축, 또는 세탁소 운영을 많이 하였는데, 세탁소는 주로 백인이 손님이고 신용카드나 가계수표를 써서 계산대에 실제 현금이 많지 않다. 내가 일하던 뷰티서플라이나 식품점은 흑인지역에 위치하였고, 흑인들이 월초에 받은 복지혜택 식료품바우처로 식품점에서 물건을 사고 현금으로 잔돈을 거슬러서 그 현금으로 부분머리를 구입하였다. 주로 현금으로 거래를 하여 뷰티서플라이나 식료품에는 상대적으로 현금이 많아서, 흑인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금요일과 토요일처럼 손님이 많은 날에는 경찰을 불러서 경찰이 주차장에 경찰차를 주차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 경찰에게 수고비를 지불해야 하지만 범죄를 미리 예방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흑인지역은 한 낮일지라도 차를 운전하여 지나가는 것도 위험할 수 있었다. 나는 운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GPS가 없어서 새로운 도시에 가면 그 도시의 지도를 구입해서 미리 지도로 로컬길을 살펴보고 이정표가 될 만한 길이름을 적어놓고 우회전 또는 좌회전을 적어놓고 길을 찾아다녔다. 고속도로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차선 변경하기가 어려워서 제때 빠져나오지 못하면 영영 고속도로로 쭉 가는 수가 있었다.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도 입맛은 토종 한국인인 남편을 타박하면서 나는 늘 말해왔다.


“햄버거도 안 먹을 거면서 왜 굳이 미국까지 온 거야?”


자동차가 단 한 대 밖에 없었으므로, 남편을 캠퍼스에 내려주고, 뷰티서플라이로 향하면서는 절대 고속도로를 타는 일 없이, 이리저리 로컬길로 시속 30마일로 달렸다. 하루는 사장님이 가게에 올 때 어떻게 오느냐고 물어보시길래, 안전하게 로컬길로 온다고 하였더니, 이 지역은 대낮에도 달리는 차를 막아 서며 총으로 위협해서 귀중품이나 돈을 뺏을 수 있다고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였다. 아니, 가능한 한 로컬이 아닌 고속도로를 이용하라고 조언하였다. 아직 직접 당해보지는 않았고, 흑인보다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것이 더 무서운 나는 ‘오늘도 무사히!’ 기도를 하고, 어디서 누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은 없는지 항상 주위를 살피면서 '보호와 인도'의 찬양인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진심을 담아 부르면서, 그냥 쭈욱 로컬로 다녔다.


미국에 와서 햄버거를 안 먹는 거나,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목숨 걸고 로컬에서 운전하는 거나... 오십 보 백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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