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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읽는 흑역사

#9. 어린이집 개원식

by Peregrine

1998년


복지재단의 어린이개발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계열사인 생명보험사에서 직원들을 위한 어린이집을 지을 재원을 마련하면 복지재단에서 원장을 채용하고 어린이개발센터에서 교육프로그램을 관리하고 보육센터에서 시설관리를 하였다. 당시 전국에 30여 개의 어린이집이 있었는데, 어린이집을 개원하면 개원식은 여러 주요 인사들이 초청되어 리본커팅도 하고 리셉션도 진행되었다. 개원식 주최는 다른 부서에서 하지만 행사를 계획하면서는 모든 직원에게 당일 맡는 임무가 주어졌다. 나는 김대리님과 함께 주요 인사들의 신발을 맡았다. 어린이집은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이라, 주요 인사들도 어린이집 입구에서 리본커팅을 하고 나면,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시설을 둘러본 뒤, 지하 강당에서 식순에 따라 행사를 진행하고 마련된 리셉션장에서 간단한 다과를 하고 개원식은 마무리가 된다.


행사 준비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동선을 계산하여 시간별로 일정을 계획한다. 주요 인사의 차량번호를 미리 알아서 주요 인사들이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각 인사마다 담당인원이 안내하고, 행사가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하는데 만전을 기한다.


개원식 당일, 김대리님과 나는 입구에서 들어오시는 주요 인사들에게 목례를 하고 들어가시면, 신발을 집어 신발장에 넣었다. 그런데 남자들 신발이라는 게 색상은 거의 97퍼센트는 검은색이고 디자인도 거의 비슷하였다. 다행히 한 교수님이 여자분이었다. 안에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김대리님과 나는 이 신발이 누구 것이었더라, 저 신발은 누구 것임이 틀림없어하며 최선을 다해 매칭게임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안에서 행사가 끝났는지 많은 분들이 우르르 입구로 나오셨다. 우리는 몇몇 신발들을 미리 바닥에 내려놓아, 순조롭게 손님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자연스럽게 나오시는 분을 보고 신발장에서 인사의 신발이라고 확신하는 신발을 꺼내어 신기 편하도록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부사장님이 나오셔서 신발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신발을 신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부사장님이 신발을 내려다보시더니 우리 두 사람을 차례로 쳐다보셨다. 그러더니 우리가 서 있는 곳을 향하여 성큼성큼 다가오셨다. 신발장을 등지고 서 있던 우리 두 사람은 홍해가 갈라지듯 양 옆으로 비켜서게 되었다. 부사장님이 당신의 신발을 찾아 직접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으신 뒤 신으셨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다시 차례대로 쳐다보시며 눈을 마주치고는 서둘러 나가셨다. 그 뒤에 계시던 성이사님이 지나가면서 차례로 우리 둘과 눈도장을 찍고 가셨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지하 리셉션장에서 다 같이 다과를 하면서, 우리가 부사장님 신발을 놓친 것을 이야기하였다. 다들 행사를 성공리에 마쳤다고 좋아하였는데, 우리 두 사람은 뭔가 찜찜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에 성이사님이 스트레스로 담배를 피우실 정도의 실수였다고 생각되었다.




얼마 후, 다른 어린이집 개원식을 준비하는 회의를 하였다. 담당자가 회의 자료를 보면서 진행하는 동안, 이번엔 나는 무슨 일을 맡게 될까 하고 나의 이름을 찾았다. 김대리님은 다른 업무를 맡았고, 내가 생명보험의 정주임님과 신발담당을 하게 되었다. 정주임님은 지원이고 내가 책임이었다.


‘하! 큰일 났다, 그 어려운 신발을!’하면서 심호흡을 하고 표정관리를 하였다. 나의 마음을 읽으셨는가? 성이사님이 한마디를 하셨다.


“채송이 씨, 채송이 씨는 정말로 챙겨야만 하는 주요 인사만 꼭 챙기면 되는 거예요.”


“네!”


‘주요 인사들 신발은 절대 놓치면 아-니-된-다!’ 복명복창을 마음속으로 하였다.




개원식 당일이 되었다. 내가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되는 주요 외부 인사는 여섯 명이었다. 그리고 내부 인사는 부사장님과 두 이사님! 어린이집에 도착하자마자 포스트잇에 적어온 주요 인사의 이름을 각 신발장에 붙여두었다. 생명보험 이 회장님이 주요 인사 여섯 명 중 한 분이었다. 지원 나온 정주임님에게 이 회장님의 얼굴을 잘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잘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주임님에게 이 회장님과 다른 두 분의 정보를 주고 그분들의 신발을 놓을 자리를 알려주었다. 딱 그 세 분의 신발은 반드시 관리를 해주십사 부탁하였다. 내가 맡은 세 명의 주요 인사와 세 분의 임원들 중 두 분은 여성이었다. 감사하여라!


드디어 리본커팅식을 마치고 손님들이 어린이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들어오시는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목례를 하면서 곧바로 신발로 시선을 향하여 그 뒤를 따랐다. 신발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서 신발만 덩그러니 남으면 그 신발을 집어 이름표가 있는 자리에 놓아두었다. 안에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주임과 획득한 신발을 점검해 보았다. 정주임님도 세 켤레의 신발을 모두 확보하였다.


행사를 모두 마치고 밖으로 나가시는 주요 인사들의 신발을 하나하나 내어드리고, 목례로 한 분 한 분 배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이사님이 나오시자, 눈을 마주치고 신발을 내어드리며, 미소로 배웅하였다.


강당에서 남은 리셉션 음식을 정주임님에게 권하고 감사를 드린 다음, 나도 마음 가는 대로 간식을 먹었다. 주요 인사들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데 묘하게 신발들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아 눈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머리를 저어 떨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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