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평등학원
1997년 여름
조교직은 최대 2년까지 일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조교 임기는 7월 말까지였다. 아직 대학원을 졸업하려면 1년이 더 남았고, 조교를 마치고 나면 장학금을 받더라도 나머지 학비를 위해서는 파트타임으로라도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학과사무실로 이르면 10월부터 졸업생 또는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유치원 교사를 추천해 달라는 연락이 여러 유치원으로부터 왔다. 그러면 유치원 정보 등을 정리해서 학과장 교수님께 전달해 드리면, 선생님께서 적합한 학생들을 추천해 주시고, 해당학생에게 유치원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때 이른 5월 중순에 학과사무실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평등학원인데 병설유치원 임용고시반을 담당하여 가르칠 강사를 구한다는 것이다. 홈커밍 데이에 대학 강단에서 교수 및 강사로, 교육 관련 연구소에서 연구자로, 방송국 진행 및 프로그램 참여자로, 병설유치원 교사로 활동하시는 선배님들이 오셔서 많은 정보를 주셨지만 학원강사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병설유치원에 합격한 언니들도 학원에 다녔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나는 두 차례 임용고사 준비를 하였다. 대학 4학년 때 한번, 그리고 조교 1년 차에 또 한차례. 4학년때에는 전공과목이 아닌 교육학 과목은 김대기 강사의 수업을 들었다. 폭은 좁고 기다란 교실에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촘촘히 채워진 책상에 거의 빈자리가 없이 모든 전공자들이 꽉 들어차서 교육학 공통과목 수업을 들었는데, 문제풀이가 주였다. 주된 시간은 당신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큰 사고가 있었고, 기적적으로 살아나면서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다만 전문대학에서 가르치는 시간강사라면 모를까 학원강사를 추천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유아교육 지식은 충분히 배웠는데 스스로 공부를 해야지 학원을 다닌다? 뭐 그런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저희 석사선생님들은 보통 전문대학으로 강의를 가셔서요. 저는 아직 대학원생인데 가능할까요?” 하고 물어보았다.
“아, 그럼요. 그럼 면접 한 번 보실래요?”
종로서적 근처 평등학원 2층으로 약속 시간에 맞추어 양 선생님을 찾아갔다. 전화를 통해 들은 목소리와는 다른 뭐랄까 사무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친숙한 느낌의 양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토요일에 평등학원에서 한 반에 3시간씩 2반을 가르치는 조건이었다. 교재는 이미 대학원생인데 내가 알아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보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시간당 2만 원씩 또는 학생수가 적으면 학생당 6만 원씩을 지불할 수 있다. 유아교육과목은 수강생을 아직도 계속 모집 중인데 학생수가 아직까지 3명밖에 안되니, 선생님이 능력껏 더 많은 수강생을 모집하라는 차원에서 수강생당 6만 원씩을 지불해 주겠다. 그럼 한 번 해보겠다고 하고 양 선생님과는 인사를 하면서 나가는 길에 잠깐 학원을 둘러봐도 되겠느냐고 물어보고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와서 곧바로 혼자서 강의실들을 둘러보았다. 한 강의실에 강사 한 분이 학생들이 오기 전에 혼자 강의실에서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하며 강의실에 들어가서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간호학을 가르치는 강사분인데, 주중에는 전문대학에서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현재 수강생은 6명이라고 하였다.
학원을 나서면서 곧바로 종로서적에 들러서 교재들을 찾아보았다. 두 번에 걸쳐서 공부하던 책은 있었지만, 새로운 교재가 나와 있는지 살펴보아야 했다. 유아교육만을 위한 교재나 문제지는 특별히 없었다. 3시간 강의를 하려면 전반적인 교육내용을 두 달 동안 정리를 하고 교육학과 유아교육 과목을 모두 문제로 다루도록 하였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수강을 한 다음에는 스스로 시험까지는 반복해서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1시간 45분 동안 내용정리를 하고 15분 휴식을 하고 1시간 동안 문제를 풀어보는 식으로 강의 준비를 하였다. 두 달 동안의 강의가 끝나면 하나의 교재가 될 수 있도록 8주의 강의계획서를 잡아놓고 매주 강의 내용과 문제를 뽑아 교재를 만드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고 나서 강의 준비를 하면서는 수강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곁들이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예를 들면, 교육사 및 교육철학에서는 인간을 성선설로 보느냐 성악설로 보느냐에 따라 유아를 가르치는데 근본적인 교수방법이 달라지는 것을 비교해 주었다. 초등교육 이상부터는 주로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데 반하여 유아교육은 성인과 다른 발달단계에 따라 사물이나 주변 상황을 인식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으므로 발달심리에서 출발하여 다른 교육방법으로 접근하게 된다는 식이다. 혹은 프로이트의 이드에 따른 발달단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면서는 기억에 남도록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남아가 힘도 세고 강력한 아빠에게 느끼는 콤플렉스의 일례를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찾았다. 뜨거운 피를 가진 세 아들들의 삶을 연관시켜서 교육내용을 잊지 않도록 준비하였다.
또 한 가지 나를 위한 준비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강의료 결산을 할 때, 수강생 수에 따라 혼돈이 있을 수 있고, 나 역시 몇 명의 수강생이 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기에, ‘학생기록카드’를 멋지게 만들었다. A4용지에 위아래로 두 개의 표를 넣어, 학생명, 학교명, 전공 및 응시이유를 적을 수 있도록 하였고, 이를 출력하여 가운데 선을 자르면, 2장의 학생기록카드가 나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여유 있게 20장을 만들어 갔다. 음, 그래 1년 등록금은 벌어보자!
돌아오는 토요일에 막상 강의를 하고 보니, 학생들의 의욕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보니 나 역시 신명 난다고 표현해야 할까? 3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강의가 끝나고 집에서 긴장도 풀리고 과자를 집어먹으며 앉아 있자니 왠지 허탈하였다. 가방에서 학생기록카드를 찾아 꺼내 들었다. 그 숫자를 세어보았다. 두 반을 합쳐서 13명의 수강생이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780,000원! 도대체 두 달 수강료가 얼마인데 학생당 6만 원을 줄 수 있지? 그리고 학생기록카드 내용을 읽어보았다. 내가 받게 될 보수와 학생들의 진지함을 깨닫고는 나 역시 부담감이 생겼다. 나 하나 공부해서 시험을 보고 합격하거나 불합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시험 응시할 자격이 안되어도 그냥 시험을 치러볼 걸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실전문제와 실제로 시험을 봤다면 얼마나 수업준비에 도움이 될까? 나 혼자 수업을 들으려고 책을 읽고 준비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강의를 준비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한 주의 대부분 시간을 강의준비 하는데 할애하였다.
그다음 주 토요일에 강의실에 들어서니, 깜짝 놀랐다. 학생들 수가 한 주 전과 비교해 눈에 띄게 많았다.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 시선이 위로 향하려는 것을 잡아 끌어내려 다시 학생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고 환영하는 눈빛을 발사하였다. 정신도 챙겨서 "새로 등록하고 오늘 처음 강의에 오신 분은 손 들어주세요!"하고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 '학생기록카드'를 건네주고 작성하도록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두 번째 강의도 한눈에 봐도 스무 명은 넘는 수강생들이 있었다. 이미 첫 번째 강의를 한 내용을 동일하게 가르치면 되고, 늘어난 수강생 숫자에 고무되어 날아갈 듯한 마음으로 강의를 마쳤다.
강의가 끝나고 교무실에서 복사를 하고 있는데, 양 선생님이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다.
“최교수님, 인기가 장난이 아니에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광주에도 학원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서 다음 주부터 일요일에 두 반 강의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뭐 비행기를 타시던 우등고속을 타시던 교수님이 알아서 표를 끊어 가시고 나중에 다 정산해 드릴게요.”
그다음 주, 토요일은 종로에서 일요일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뜨거운 주말을 보냈다. 광주로 향할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갔고 광주에서 올라올 때는 우등고속을 탔다. 광주에서 나의 수업을 듣는 수강생은 33명이었다. 이번 학기는 엄마한테 손 벌리지 않고 자력으로 살아가겠노라!
한 달간 나의 기도제목은 '강의를 준비하고 강의를 하는 내내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시고,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 모두 순위고사에 합격할 수 있는 축복을 내려주옵소서, 아멘!'이었다. 네 번째 강의를 종로에서 마치고, 양 선생님이 보수를 정산해 주겠다며 잠깐 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서로 둥그런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앉았다. 부푼 마음을 지근지근 밟아도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양 선생님이 먼저 말 문을 열었다.
“최교수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수강생도 많이 늘었고, 저희도 신경 많이 써드리려고요. 광주 수업은 한 달이 되면 광주에서 보수를 드릴 거예요. 첫 강의시지만 지방에도 출강하시고, 교통비도 감안해서 원래 시간당 2만 원인데 저희는 3만 원씩 해서 드렸어요.”
“네? 아니, 학생당 6만 원 아닌가요? 그리고 비행기를 타던 우등고속을 타던 실비를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학생당 6만 원은 학생수가 적을 때 얘기고, 선생님 반은 학생수가 많잖아요. 그리고 비행기를 타던 우등고속을 타던 그건 선생님 재량이신데 그걸 다 반영할 수는 없고요. 광주에서도 교통비는 고려해 줄 거예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화가 났다. 지금 내가 사기를 당하는 건가? 아, 무슨 계약서나 뭔가가 서류가 있었어야 했다!
“저는 분명히 선생님이 학생당 6만 원을 주신다고 하셨고, 교통비는 비행기를 타던 우등고속을 타던 실비를 주신다고 하셔서 강의를 했어요.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저는 강의 안 해요. 다음 주부터는 강의 못합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보수”를 들고 나왔다. 광주를 오가던 교통비까지 고려하면 정말 하나도 남는 돈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그렇게 큰돈을 만질 수가 있겠어? 강의를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남을 가르치는 부담감에 비하면, 나 하나 공부하는 건 참 쉬웠다. 그래 남은 학기 공부나 열심히 하자!
1년쯤 지나서 우연히 다시 종로 뒷골목에서 양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평등학원과 가까운 거리였고 양 선생님은 가판에서 간식을 사 먹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대학 시절부터 늘 주된 만남의 장소는 종로 2가 뒷골목인지라 그다지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길어지기 전에 자리를 파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 선생님이 먼저 예전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아이고, 그때 내가 수강생들 수강 취소한다고 환불해 주느라고 신물이 났었어요. 그렇게 설득을 해도 다 취소하더라고. 선생님 다시 강의할 생각은 없으세요?”
“저 취직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당했는데, 선생님도 참!” 하고 서로 헤어졌다.
강의를 그만두었다고, 학원장이 직접 나에게 전화 걸어서 온갖 험한 말을 하였었다. 다 들어주다가 저쪽의 공격이 잔잔해질 즈음, 나도 한마디 하였다.
“학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왜 그런지는 양 선생님한테 물어보세요.”
수강생들에게는 진짜 미안하였다. 임용고시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나도 강의를 준비하면서 함께 달리는 말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나 역시 두 번 임용고시를 준비하였기에 이번 기회에 내용을 정리하는 교재와 문제집을 완성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학생들의 숫자에 6만 원을 곱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 보수에 부끄럽지 않도록 나의 시간도 쏟아부었다. 양 선생의 끈적끈적한 융통성이 역겨웠고 나의 어리석음은 참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