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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오십에 읽는 흑역사

#11. 임산부가 먹고 자는 건 무죄?

by Peregrine

2002년


나도 결국 2001년 8월부터는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였다. 다행히 남편도 나도 전액장학금으로 등록금과 10개월치의 생활비를 받게 되었다. 학업에 좀 더 집중하고자, 교회에서 가까운 아파트에서 살다가 집, 강의실, 도서관을 잇는 동선을 모두 걸어서 가능한 캠퍼스 내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여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된 9월이었고, 그날은 전공수업이 오후 2시부터 있었다. 수업시간까지 읽어야 할 자료들과 한창 씨름을 하고 있는데,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남편의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에서 비행기 추락사고가 났는데,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 전화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아니, 작은엄마, 큰 사고예요. 뉴스에도 크게 나왔어요.”


읽던 책을 덮고 텔레비전을 켰다.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두 비행기가 시간차를 두고 각각 빌딩에 충돌하자 건물이 아래로 주저앉듯이 무너져 내렸다. 영화 같은 현실!


첫 번째 수업은 취소가 되었다. 두 번째 수업도 취소가 되었으려니 하는 마음이었지만 전공과목으로 학생수가 적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은 강의실로 갔다. 모든 학생이 온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학생과 교수님은 오셨다. 다들 뉴욕이나 펜실베이니아에 사는 친인척들이 안전한지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모두가 받은 충격은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이게 현실인지가 믿어지지 않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서로 얘기를 하였다.


그 이후로도 학교에서 이슬람계 학생들과 심리학 교수 등 패널들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와 감정을 토로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서로 현 상황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교육사회학 수업에서도 거의 3주간 강의계획에 있는 내용을 공부하기보다 9/11 사건에 대한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


사실 유학을 하겠다고 영어공부를 하였지만, 입학사정에 필요한 토플이나 GRE 같은 영어시험에서 점수를 받기 위한 공부였다. 실제 수업을 듣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의 문해능력이나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이해하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의 말하기 실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교육학이다 보니, 학생들도 현직 고등학교 교장 또는 교사들이었다. 그래도 수업준비를 위해 강의계획서에 나와 있는 그 주의 교육내용에 해당하는 교재를 열심히 읽어가서 읽은 내용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도 표현현하고 오자, 하는 마음으로 수업에 갔었다. 하지만 실제 수업에서 토론하는 내용은 교재내용이 아니라 당시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사안에 대한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 일례로, 그 당시 버지니아에서는 학교버스를 타는 학생들이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안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차라리 다른 사람이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그냥 맨 먼저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가령 적어도 유치원 연령의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안전벨트를 끼고 풀고 하는 훈련이 가능한지 의구심이 든다는 등의 의견을 내고, 그다음에는 자기들끼리 떠들든 말든, 그래도 오늘은 한마디 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교재내용과 전혀 다른 주제로 토론이 전개되면 ‘어, 갑자기? 오늘도 말 한마디라도 해보긴 다 틀렸네.’하고 일찍이 포기하고 가만히 듣기 모드로 떠드는 학생들을 향해서 고개만 이리저리 따라 돌아보는 것이 내가 수업에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교육사회학 수업에서도 교재 따로 토론 주제 따로는 마찬가지 여서, 듣기 모드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열심히 귀를 열고 눈을 굴리며 혹시 아는 단어라도 나오려나 듣고 있었다. 그러다 귀가 번쩍 트이는 아는 단어가 나왔다.


“911 (Nine, one, one).”


나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아는 단어이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왜 소방서 전화번호가 나올까, 교육사회학에서… 최근에 무슨 사건이 있었나?.... 뭔 소리야? 한참을 듣다가 ‘아하! 9.11 테러를 말하는 거구나!’ 소방서 응급번호 911을 9월 11일 테러로 대입하니, 쑤셔대던 잘못된 열쇠를 다른 열쇠로 바꾸어 꽂아 돌리니 문이 활짝 열리듯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으이구, 인간들아, 그냥 나 같은 사람 생각해서 September Eleven이라고 할 것이지. 잘났다, 잘났어.’




개인적으로는 또 다른 깜짝 소식이 있었다. 임신을 한 것이었다. 다행히 출산은 학기가 끝나고 방학 동안에 예정이 되어 있었다. 나의 주된 임무는 먹고, 읽고, 자는 일이었다. 다행히 입덧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어도 참 맛있었다. 특히나 맥도널드의 필레오 피시와 감자튀김은 매끼 먹어도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하루는 피자 한판을 야금야금 먹다 보니 나 혼자 큰 피자의 여섯 조각을 먹어버렸다. 보통 임신하면 20 파운드 정도 몸무게가 불어난다는데 나의 경우는 늘어난 몸무게가 거의 40파운드에 가까웠다. 남편은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등 운동을 하라고 하였다.


‘이래 봬도 두 사람인데 운동하다 다치면 큰일 날려고!’하고 운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예정일이 지나도 아이가 안 나오자, 손으로 배를 만져보면서 아기가 아직 너무 작은 것 같으니까 초음파검사를 해보자고 하여 일정을 잡았다. 예약된 초음파검사 일정이 되기 전에 결국은 36시간의 긴 진통을 겪은 끝에, 아들을 낳았다. 의사의 예상과는 달리 아기가 9.8 파운드나 나가서 의사가 깜짝 놀랐다고 하였다. 아기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아기는 처음 낳아봐서 보통 아기들이 몇 파운드나 되는지를 알지 못해, 그리 놀랄 일인가 싶기도 하였다.


오히려 나는 아이의 몸무게보다는 온몸이 너무 많이 부어 있는 나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언니 둘과 새언니가 아기를 낳은 뒤 모습을 보았지만, 나와 같이 산모가 심하게 부은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내 배는 여전히 산만하였다. 세상 참, 이상하다.


2인실 병실에 누워 있어도 나는 일어나서 앉을 수도 없을 정도로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옆에 침대의 흑인 산모는 워낙 날씬하기도 하지만, 병실을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아기는 5파운드 남짓의 몸무게로 태어났단다. 우리 아들이 좀 크기는 한가 보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돌아와 덩그러니 아기와 나란히 누워 있자니,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아기가 잠이 든 사이에 나도 아직 몸은 회복이 잘 안 되어서 앉아 있기는 아래가 아파서, 주로 누워 있었다. 누운 체로 병원에서 임신 기간 동안 참조하라고 준 임신과 출산에 관한 잡지를 읽어 보았다. 학기 중이라 수업을 듣고 보고서를 작성하느라고 태교를 할 시간은 없었다. 아기 옆에 누워서, 여러 기사를 보니 아이를 순산하려면 임신기간에도 건강한 음식과 규칙적인 운동을 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진통이 오면 라마즈 호흡법으로 진통을 관리하는 유용한 정보도 있었다.


정말 첫 학기를 시작하면서, 느린 속도로 영어교재를 읽고 수업을 따라가고, 9/11 테러가 벌어지고, 학업을 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기는 하였다. 그래도 시간을 내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정보 좀 읽어 둘 걸! 바쁘게 돌아다녀도 운동을 안 하면, 아기만 커지는 건가? 그들의 기준에서 초대형 아기와 출산 후에도 헤비급 체급을 자랑하는 산모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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