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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Mar 18. 2023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

1.


엉덩이가 굳다 못해 저려온다. 모든 움직임이 제한되는 곳이다. 적당히 어두운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흐름대로 움직이고 있다. 대부분은 콘텐츠를 소비해 가며. 이런 때는 킬링 타임용 영화나 드라마가 딱이다. 내용이 가볍고 전개가 황당할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옆에 앉은 남자는 아주 스윗하다. 누군가의 아빠 같다. 나와 현아는 두 종류의 기내식을 시켜 나눠먹기로 한다. 하나는 영양 찜닭 덮밥, 하나는 스테이크였다. 옆에 앉은 외국인은 찜닭을 고르는 걸 보았다.


현아는 나보다 몸집이 작아서 다양한 자세로 잠을 잔다. 능력이 좋아 보인다. 나는 베개 위치를 바꾸거나, 다리를 꼬는 정도로 만족한다. 실은 다리를 꼬는 것도 어렵다. 앞사람이 의자를 뒤로 젖힐수록 내 다리는 뻣뻣해진다. 그러면 결국 나도 의자를 젖힐 수밖에. 뒷사람이 당황하지 않도록 조금씩 매끄럽게 의자를 젖혀가는 중이다.


우리는 통로가 아니라 창가 쪽 두 자리를 선택했다. 그래서 가장 바깥에 앉은 남자가 일어나야만 나갈 수 있다. 그가 화장실을 가는 틈에 우리도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가글을 하고 볼일을 본다. 화장실에서 여유롭게 무언가를 할 시간은 없다. 항상 기다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줄에 앉은 사람들끼리는 생체 리듬이 맞춰지고 있다.


아빠가 챙겨준 목베개는 라텍스 폼이다. 우리 집엔 두 개의 목베개가 있는데, 하나는 딱딱하고 하나는 말랑하다. 아무래도 아빠가 준 녀석은 말랑한 쪽인 것 같다. 그런데 비행하는 동안 쓰기에는 목의 위치와 높이가 맞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빠의 소중한 무엇을 괜히 뺏어온 느낌이다. 그가 매일 쓰던 목베개였는데… 결국 환승을 하다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첫 도착지까지 가져가지도 못했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비밀로 할 예정이다.


처음 집을 떠나는 딸을 배웅하는 아빠의 모습을 기억한다. 내가 새벽 네시에 나가야 하는 탓에 그는 잠들어있었지만, 나와 같이 네시에 알람을 맞춰두었다. 내가 나간다고 하자마자 안대를 위로 올리고 벌떡 일어나 따라나온다. 그리고 한 번 안아주고 매일 연락하라는 이야기를 세 번 정도 한다. 아무래도 그는 수없이 걱정하는 밤을 보낼 것이다. 딸의 첫 자취가 유럽이라니. 멀어도 너무 멀잖아.


3개월 간의 여행 동안 나는 일상과 관련된 모든 것,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차단된다. 익숙했던 어떤 것도 주변에 없다. 친구 말고는. 이토록 완벽한 물리적 분리라니, 자주 바랐던 일이지만 아주 두렵기도 하다. 지금 나는 8시간의 시차를 건너가는 중이다.


남자친구와는 몇 번의 인사를 했다. 오히려 보내는 그보다 떠나는 내가 더 슬퍼했다. 돌아올 것이지만, 3개월 간 그와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막막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데 초점을 두었다.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무엇을 두려워하는지가 결정되는 법이다.


각각 14시간과 2시간의 비행이 끝나면 나는 바르셀로나에 당도할 것이다. 위험하고 낯설고 떨리는 곳이다. 그 모든 감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설렌다. 모르는 곳에 나를 던져 놓는 경험이라니. 이런 도전은 조금 반갑다. 여행하는 매일이 도전이 되고 퀘스트가 될 것이다. 성취하지 못하면 아주 위험하거나 돈이 아까울지도 모른다. 그걸 풀어갈 생각에 조금은 말똥해지는 기분이다. 더 잠이 깨기 전에 어서 잠들어야 할 텐데.


현아는 예능과 인터뷰와 다큐를 보다가 잠을 잔다. 나는 하이틴 영화를 보고 글을 고쳐 쓴 후, 새로 쓴다. 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다를 우리의 여정, 핑거스 크로스드…


2.


벌써부터 이곳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기적이라고 느낀다. 너무 멀고 먼 땅이라 가만히 창밖을 보기만 해도 조금은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함께 있는 사람, 대화를 시작한 사람이 모두 소중해진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그가 후쿠오카에서 무슨 일을 하는 프랑스 사람이라는 사실만 알았는데, 착륙하기 한 시간 전쯤 어떤 콘텐츠에도 흥미를 잃자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는 내가 아저씨에게 물었다.


두유 리브 인 패리스?


그는 친절하게도 웃으면서 자신이 사는 남쪽 끝의 한 도시를 가리켰다. 우리 각자의 눈앞 태블릿에는 어둠 속을 빙빙 돌고 있는 지구본이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세계가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한 곳, 파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엠비씨 같은 곳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정확히는 무슨 업무인지 모르겠으나 얘기하기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유럽의 수많은 곳들을 여행했고, 한국과 일본을 다녀갔으며 곧 베트남에서 일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유럽 여행이 처음인 우리에게 축하한다며 충분히 즐기되 조심하라고도 일러주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불안했던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너무 겁내지 말라고,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또 한국보다는 일본 음식이 아주 맛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일주일 남짓의 여행뿐이고, 일본은 4년을 살았으니 그 정도 오해는… 넘어가기로 한다. 그리고 우리네 음식을 자랑할 만큼 유창한 영어도 아니었기에. 정말 아쉽다. 떡볶이, 김치찜, 닭볶음탕의 진가를 알릴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한 시간 무렵의 대화 후에 그는 우리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의 신변을 손에 쥐니, 우리가 신뢰받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도전적인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아마 다시는 그를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 낯선 땅에서 조금은 낯설지 않은 만남들이 자주 위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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