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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Nov 15. 2023

코코코코코코, 입!

지난 주말에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정주행했다. 12편밖에 없어서 3일만에 끝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데는 끈기가 대단하다. 그 드라마에는 여러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황 장애다. 곧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공포를 겪는 사람들. 물이 차올라서 잠길 듯한 공포를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고통이 언제 어떻게 어디서 발현될지도 예상할 수 없다.

어떻게 인간의 신체가 스스로를 그렇게 극한의 공포로 몰아갈 수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지만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가장 슬펐던 건… 그 사람들이 119를 부를까 수십 번 고민하다가 결국 부르지 못하고 괜찮아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정말이지 죽을 것 같지만 당장 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구급차가 오기 전에 높은 확률로 괜찮아질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안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숨이라는 게 그렇게 사람을 쥐락펴락한다. 잠깐이라도 쉬지 못하면 정말 죽을 것 같고… 바로 어제, 피부과에서 비슷한 공포를 느꼈다. 레이저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얼굴에 레이저를 쏠 때마다 온몸이 곤두서는 아픔이 느껴졌다. 피부 장벽을 뚫고 들어가 내부의 무언가를 억제하는 치료 같았다. 정확히 무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필요하다니까 받고 있었는데, 그 기계가 얼굴 곳곳을 지나갈 때마다 미니 선풍기처럼 찬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코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미세하게 숨을 참게 되었다.


불규칙한 무호흡이 반복되다보니 어느 순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를 알짱거리는 기계가 내 숨을 막는 것처럼 느껴졌고… 바람만 부는 게 아니라 레이저가 죽도록 아팠다… 나와 원장님과 간호사님 세 명이 들어가있는 진료실이 너무나 갑갑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잠시 멈춰달라고 부탁했다. 8회차 진료를 받는 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떠한 공포 같은 게 느껴졌다. 새로운 상황이었지만 아예 새로운 느낌은 아니었다. 가끔 물에서 느끼는 공포와, 드라마에서 봤던 물이 차오르는 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공포들이 내게도 늘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공포는 다른 상상으로도 이어졌다. 앞으로 여름에 물놀이는 어떻게 할 것이며, 서핑은 또 어떻게 할 것이며… 죽을 때 제발 숨이 차서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니까 숨과 관련된 미래가 두려워졌고, 그래서 그 고통으로만은 죽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벌써 죽음까지 찍고 온 나의 상상력이 놀랍고, 짧은 순간 공황장애를 겪던 드라마 속 주인공의 얼굴이 스쳐가는 것도 두렵다… 그와 비슷한 공포를 느끼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의 아프다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가깝게는 아빠가 있었다. 몇 년 전에 아빠도 공황장애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것이 모두 지나간 후에 들어서 어떠한 공포도 직면한 적은 없지만… 아는 분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아빠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덧없음을 느꼈던 것 같다. 동시에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 취약한 아빠의 정신이 잠시 탄력을 잃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어떤 공포를 어떻게, 얼마나 자주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가 너무 힘들었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인은 아니지만 이슬아 작가도 폐쇄공포를 겪었다고 읽었다. 가장 자주 읽었던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서였으니까,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데뷔 초반이었던 그 때, 그가 좁은 공간에서 느꼈던 공포를 실감하게 됐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도 그것을 느꼈다고 했다. 창문이 열리지 않는 공간에서, 아는 사람도 없이 느껴야 했을 공포가 얼마나 거대했을지. 그러나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진정이 된다고 했다. 아무래도 세계와의 연결감이 없는 곳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내가 너무 잘 아는 사람, 그리고 잘 모르는 사람의 공포에 대해 짐작하게 됐다. 그건 드라마와 피부과와 가족과 책이 연결되는 경험이었다. 그 속의 사람과 경험이 공포라는 감각으로 일직선상에 놓였다. 어쩌면 내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와 일직선상에 놓이기 위함이 아닐까. 그들을 이해하고 또 이해받는 경험이 나를 쓰게 하는 것 같다. 너무나 쉽게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라서, 성급하게 미래를 걱정하고 천천히 나아가는 사람이라서 나는 내가 두렵다. 공포라는 게 너무 가까이 있어서 또 두렵다.


어쩐지 숨에 대해 생각할수록 마음이 차분해진다. 숨이 삶 자체는 아니지만, 삶은 숨 없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어떤 책에서 ‘그래서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는 식의 문장을 본 적이 있다. 대다수의 날에는 살아있다는 게 크게 놀랍지 않아서 그냥 지나친다. 그러다 이렇게 죽음이 코 앞에 있다는 걸 실감하는 날에는 그 문장을 절실하게 붙잡는다. 지나치는 날이 많아지는 게 좋은 건지, 붙잡는 날이 많아지는 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삶이 축복인 날에는 진짜 죽음이 가까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째 비염 때문에 냄새를 못 맡고 있다. 며칠만 지나면 거의 일주일째다. 냄새 없는 삶이라고 지속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냄새를 덜 맡으니까 식욕도 감소하고 입맛도 없다. (다이어트적으로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딱히 살 맛 나는 세상은 아닌 것 같다. 냄새가 없는 삶은 무채색이고, 감흥이랄 게 없다. 그러다 가끔 아주 강한 향을 지닌 어떤 냄새가 훅 들어온다. 시나몬 향이나 리치 맛이나 쓰레기 냄새 같은 것들… 그럴 때면 아직 코가 살아있다는 자각이 든다. 정말 살 맛 나는 느낌이다.


아무튼 숨이 막히지 않았으면 좋겠고… 냄새도 잘 맡았으면 좋겠고… 코의 존재를 이토록 절실하게 깨달았던 적이 있었나. 붙어 있는데도 붙어 있는지 몰랐던 것들에게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미리미리 잘 해줘야 배신당했을 때 할 말이라도 있을 테니까. 죽음이란 건 정말 ‘코’ 앞에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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