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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un 16. 2022

맥심 3개와 10개의 차이


배가 아팠다. 어제 친구네서 숨쉬듯이 먹었던 야식 메뉴들 덕분일까. 배를 채운다기보단 시간을 채우듯 먹었다. 공복의 틈이라도 생기면  되는 사람들처럼, 닭볶음탕에 회에 피자에 빙수에, 하루치 식사를  끼에 끝냈다. 그러니 배가 아플 수밖에.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친구의 자취방은 비닐을 벗기지 않은 참기름과 간장과 올리고당이 있었고, 혼자만의 공간답게 아늑하며 포근했다.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는 원룸,  작은 공간이 우리   채보다 나았다.


방금 종강한 사람답게 나는 오후 내내 드라마를 몰아 보았고, 그건 내가 좋아하는 ‘동백꽃  무렵이었다. 순정파 용식이가 동백이를 쫓아 다니며 사건들이 일어나,  해결 동안 나도 같이 불안했다가 편안해졌다. 그리고  드라마는 끈질기고 뜨뜻한 모성애를 많이 다루고 있어서, 본인 자식들을 위해 열을 주고도 미안해하는 엄마들을 많이 접할  있었다. 엄마 밥엔 장사 없다며, 삐쩍 마른 애도 살이 오른다던데. 엄마 밥도  고 자란 난, 식당에서 구할 수 있는 트랜스지방으로 가득 찬 사람 같았다.


아팠던 배가 잠잠해지자마자 꼬르륵 소리가 휘몰아쳤다. 가끔은 육체가 정신을 앞질러가는 게 야속하다. 나는 배달음식을 시켜도 되나 둘러보다 냉장고를 열고 말았다. 만만하게 떡만둣국이나 끓여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만두 모양이  쎄하다. 젠장. 군만두였다. 결국 떡국에 군만두를 곁들이기로 하고, 밥그릇만큼의 떡과 국그릇만큼의 떡을 불려서 끓였다.  양과 아빠의 양은  차이가 없었지만, 떡이 얼마 남지 않아  때려넣기로 했다.  짜긴 했지만 귀찮았던  치고는 나름 구색을 갖춘  만족스러웠다.


아빠가 오기 전에  만둣국은 먼저 먹어치우고 싶었다.  늦는다는 아빠의 말에 떡국을 잔뜩 퍼서 앉았는데, 부재중 전화와 함께 이제 사무실에서 출발한다는 문자를 봤다. 이미  김에 먹기는 하겠지만, 괜히 찝찝했다. 근데 찝찝하기도 싫었다. 떡국을  먹을 때까지, 그리고 아빠가 도착할 때까지도 나는 동백꽃을 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누가 죽거나 울고 있는 장면들이 올 때여서, 나는 눈치를 봤다. 아빠는 조금이라도 슬픈 장면이나 우울한 드라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치만  그런 축축한 드라마 .


그래도 아빠가  먹는 시간이니까 이제 리모컨을 양보해주기로 한다. 밥을  먹은 나는 소파  구석에 앉아있었는데,  말을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었다. 괜히 어깃장이 나고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오후까지만 해도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몇번이고 들락거리면서 누룽지밖에  먹었는데,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떡국 맛있게 먹는  억울했다. 게다가 떡국이 짜다 덧붙이는 거였다. 아빠는 김치볶음밥도 못 하면서 항상 음식에 조언을 더한다. 먹을 줄 아는 사람이면 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


당이 떨어진 나는 차라리 맥심이나 하나  먹기로 한다. 정수기  서랍장을 열었더니 맥심이   개밖에 없다. 근데 베란다에는 맥심 박스가 꽉 채워져있다. 전에도 항상 서랍장엔  뿐이었  같은데, 우연인가. 아빠에게 물어보니 매번 베란다에서 꺼내올 때마다  개씩만 가져왔다고 한다. 편하게 손에   있는 만큼 가져온 걸 테다.  적어도  개는 손에 쥐 사람인데.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다르구. 나는  번을 움직이더라도  서랍장을 가득 채워 놓을 사람이고, 아빤   개만 가져오는 사람이니까.


믹스커피를 타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았다. 식사하는 아빠를 등지고 버블 파우더를 욕조에 풀어놓는다. 종강한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거품 목욕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아빠의 10 후는 어떨까, 생각해봤다. 아빠의 10 후는 모르겠고,  10 후라면 애를 키우고 있을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은 아빠 밥을 차리지만 10 후면  아이의 밥을 차릴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10년이 가장 중요한 때다. 내가 나를 위해서만 밥을 차려볼  있는 유일한 기회 거다.


 생각을 하며 거품들을 손으로, 몸으로 쓸고 있으려니 절로 멍을 때리게 되었다. 항상 핸드폰을 보던 습관도 내려놓게 됐다. 잠시 생각만 해보자고. 나는 내년부터 아빠 집에   가능성이 아주 큰데, 아빠는 과연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동생이  전역을 하겠지만 만약 걔도 기숙사에서 살아야 한다면. 아빠는 혼자가 되는 거였다. 근데 그건 아빠가 감당해야  몫인 거다. 언젠가는 떠날 새끼들이 내년에 집을 비운다고 해서 울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당장 내일은 자궁경부암 예방주사를 맞을 예정이다. 점점 체력이 떨어진다는  느낄 때부터, 건강에 대한 걱정이  심해졌다. 누군 강조하던 림프마사지를 진짜  때가  거다. 여기저기 노폐물이 쌓이고 배출도   된다는 림프절 구석구석을 꾹꾹 누른다. 원래 노폐물이란  금방 쌓이기도 하지만 금방 빠지기도 하는  아닌가. 마사지  번에 사라질 거였으면, 하루에 10 쯤이야 얼마든 투자할  있다.   쓰레기통을 비우면서 속에 있는 것들이 시원하게 배출되는 상상을 한다. 악의 없는 사람처럼 웃어보일  있는 ,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화도   있는 . 그런 날은 얼마든지 오리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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