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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동화 낙선작

#02 신춘문예 이렇게 쓰면 평생 등단은 못 한다.

by 윤자매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어린이날 선물로 받은 내 피아노가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집에서 팔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이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은 항상 집에 늦게 오셨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피아노뿐이었다. 적막한 집에 오면 나는 피아노를 쳤다. 부모님을 기다리다 피아노에 엎드려 잔 적이 많았다. 그런 나를 항상 엄마가 흔들어 깨웠다. “윤이야, 또 피아노 쳤어? 엄마가 많이 늦었지?” “괜찮아, 엄마. 피아노 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나는 집에 오면 피아노를 쳤다. 그럼 거짓말처럼 슬픈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피아노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었고 슬펐는지도 잊게 되었다. 부모님은 피아노만은 팔지 않으려 했다. 피아노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하지만 더는 피아노를 고집할 수 없었다. 이미 집으로는 독촉을 알리는 우편물들이 쌓이고 있었다. 트럭에 내 피아노가 실렸다. 피아노를 트럭에 단단히 고정하고는 곧바로 시동이 걸렸다. 부르릉 소리와 함께 휘발유 냄새가 났다. 울음을 참으려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나는 멀어지는 트럭을 바라보며 걸었다. 어느새 하얀 눈이 떨어지고 있었고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피아노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피아노가 사라진 길 위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내 피아노가 보였다. 나는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언제나 그랬듯 연주를 통해 위로받고 싶었다. 조금씩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을 때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하게 거리를 울리는 작은 종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저 멀리 무언가 달려오고 있었다. 맙소사! 종소리는 바로 루돌프 목에 달린 종에서 나는 소리였다. 청명하고 예쁜 종소리가 거리를 울리고 있었다. 썰매를 끄는 루돌프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썰매 위에는 하얀 수염의 산타가 타고 있었다. 산타는 정확히 내 앞에 썰매를 세웠다. “안녕! 혹시 네가 윤이니?” “네, 제가 윤이인데요.”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그러자 산타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길에 나와 있을 줄은 몰랐구나. 이렇게 운이 좋을 줄이야. “ 산타는 허리춤에서 작은 회중시계를 꺼내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이쿠, 이런. 지체할 시간이 없구나.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내 옆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겠니? “ “제가요? 옆자리에 앉으라고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눈의 나라로 가야 한단다. 너를 데리고 가야 해.” 산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산타의 손을 잡았다. “자, 출발한다. 손잡이를 꽉 잡으렴.” 서둘러 자리에 앉자 곧바로 썰매가 출발했다. 지금까지 타보았던 놀이기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빠른 속도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눈의 나라로 가고 있단다.” “눈의 나라요?” “응, 네 피아노가 거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제 피아노가요? 눈의 나라에서 저를 기다린다고요?” 산타 할아버지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눈의 나라에는 오래된 피아노가 있었단다. 그 피아노는 눈의 나라에 오기 전 다리를 다쳐 버려졌었어. 그러다 한 목수가 숲에 버려진 피아노를 우연히 보게 되었지. 예전 주인이 피아노 다리가 망가지자 몰래 숲에 버렸던 거야. 그 목수는 나무를 덧대어 피아노에 작은 못을 박아 다리를 고쳐주었고 그때부터 피아노 다리 양쪽에 못자국이 생겼단다. 목수는 피아노를 치지 못했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피아노를 돌봐주고 아껴주었단다. 피아노는 목수가 세상을 떠나고 눈의 나라에 오게 되었어. 그 피아노가 이제 눈의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했단다. 우리는 서둘러 피아노를 찾게 되었고 바로 네 피아노였단다.” “제 피아노가요?” “그렇단다. 이제 살았구나 했는데 글쎄 네 피아노가 연주를 거부하더구나. 눈의 나라에 내리는 눈은 피아노 건반에 닿으면 마법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낸단다. 내리는 눈에 따라 소리도 달라지지. 천천히 내리는 눈은 차분한 선율을, 빠르게 내리는 눈은 신나는 곡을 연주하지. 그런데 피아노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더구나. 글쎄 우리가 건반까지 눌러봤다니까. 아무리 건반을 눌러도 소리를 내주지 않아. 다른 피아노를 찾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도 했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어. 우리는 회의 끝에 너를 데려오기로 했단다. 너를 데려온다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결론을 내렸지.” “제 피아노는 눈의 나라에서 무엇을 하는데요?” “눈의 나라에 사는 산타와 루돌프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배달하기 직전 피아노 연주회를 연단다.” 산타 할아버지의 눈이 밝게 빛났다. “크리스마스이브, 눈의 나라 광장에 산타와 루돌프가 모인단다. 광장 중앙에는 피아노가 놓여있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피아노의 연주가 시작되지. 우리 산타들은 연주에 맞추어 루돌프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단다. 춤을 추면서 우리는 함께 선물을 배달할 파트너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 산타 할아버지가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우리도 작년 크리스마스에 만났단다. 우리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어.” 산타 할아버지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단순한 피아노 연주가 아니란다. 분명 그 연주는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준단다. 연주를 듣고 있으면 마음의 문이 열리는 기분이 들어. 우리 산타와 루돌프는 제각각 상처가 있단다. 소외받고 외로운 우리를 눈의 나라에서 귀하게 여겨주었지. 피아노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사랑이란다. 아낌없이 사랑했고 또한 사랑을 받은 피아노여야 우리를 위해 연주할 자격이 되는 거야. 눈의 나라에서 내리는 눈과 그 사랑의 마음이 만났을 때 비로소 사랑의 연주가 가능한 것이지. 바로 사랑과 사랑의 결합인 셈이지.” 산타 할아버지의 말에 루돌프의 뿔이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이 녀석도 같은 마음이라는구나. 가끔 루돌프 코에 불이 꺼질 때가 있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아. 불이 꺼지면 잠시 쉬어가면 된단다. 빨간 코가 다시 켜지면 그때 일어서면 되는 거니까. 이 녀석도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데도 나를 선택해주었지. 우리는 서로의 아픔까지도 사랑한단다.” “사실 제 피아노를 처음부터 사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정말이냐?” “제 피아노는 중고 피아노였어요. 우리 집은 새 피아노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제가 친구 피아노를 부러워하고 갖고 싶다고 졸라서 부모님이 어려운 형편에 사주신 거였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친구 피아노에 비해 제 피아노는 작고 초라했어요. 그게 심술이 나서 피아노를 오래도록 혼자 둔 것 같아요. 피아노를 쳐다보지도 않다가 그날은 부모님이 너무 늦게 오셨어요. 밖에는 비도 오고 너무 무서웠어요. 혼자 무서워서 울다가 피아노 생각이 났어요. 저도 모르게 피아노를 쳤어요. 피아노를 치니까 무서움도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피아노를 친다고 하지만 저에게는 대화였어요. 우리는 그렇게 매일 대화를 했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어요.” 산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네 말을 들으니 나도 빨리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어 지는 걸.” 산타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마치 연주가 들리는 듯 춤을 추는 시늉을 해 보였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몸짓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산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모두 꿈만 같았다. 꿈같은 이야기가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썰매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수많은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여기가 봄의 나라란다.” 봄의 나라에서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의 요정들이 땅에 씨앗을 뿌리며 봄비를 맞이하는 춤을 추었다. 요정의 노래는 아름다웠고 꽃들은 노랫소리에 맞춰 꽃망울을 터트렸다. 꽃송이 안에 사는 요정들이 고개를 쏙 내밀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름 나라는 산타 할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입고 있던 겨울 점퍼를 진작부터 벗은 후였다. 산타 할아버지는 내게 겨울 나라에 사는 요정이 주었다는 눈덩이를 건네주었다. “내가 길을 잃은 겨울 요정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더니 이걸 주었어. 겨울 나라 요정들이 눈싸움 할 때 요정의 손으로 이 눈덩이를 만들지. 요정의 손길이 닿은 이 눈덩이는 가을 나라에서 가져온 볏짚으로 짠 주머니 안에 넣어두면 절대로 녹지 않아. 이렇게 여름 나라를 지날 때 꺼내서 손에 쥐고 있단다. 그러면 아주 시원하고 좋아. 어때, 시원하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들이 시원하게 말랐다. 땀은 시원하게 마르고 눈덩이를 쥔 손은 시리지 않았다. 땀이 가시고 볏짚으로 짠 주머니에 조심스레 눈덩이를 넣었다. 가을 나라 요정들은 추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밝은 표정의 요정들은 여문 벼 이삭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겨울 나라는 요정들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눈을 굴려 커다란 눈사람을 만드는 요정도 있었다. 아이 같은 표정의 요정들은 잔뜩 신이 났다. “벌써 눈의 나라에 다 왔구나. 꽉 잡으렴.” 눈의 나라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썰매는 눈의 나라 광장에 멈췄다. 멀리서도 나는 내 피아노를 단 번에 알아보았다. 광장 중앙에 내 피아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많은 산타와 루돌프가 모여 있었다. 썰매에서 내린 산타 할아버지는 나를 내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피아노는 함박눈을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조심스레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울컥 눈물이 나왔지만 나는 꾹 참기로 했다. 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기쁜 순간에 울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건반에 손을 올렸고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연주했고 광장에 모인 루돌프와 산타들은 춤을 추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랜 시간을 우리는 행복했고 가슴이 벅찼다. 어느새 나의 연주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의 연주는 끝이 났고 건반에 가까이 얼굴을 대었다. 나는 엎드린 채로 피아노에게 말했다. “소중한 나의 피아노. 너를 잃은 줄 알고 너무 슬펐는데 이곳에 네가 있다니 너무 설렜어.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 너와 호흡하는 모든 시간이 행복이었어. 네가 내 곁에서 나만의 피아노로만 살아주길 바랐던 것 같아. 그런데 많은 이들을 위로하고 그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면 나는 정말 기쁠 것 같아. 잘은 모르지만 이 값진 일을 네 스스로 해낼 것이라 믿어. 그래서 나는 너를 기쁘게 보내주려고 해. 이제는 정말로 안녕을 해야 할 것 같아. 너를 영원히 사랑할게.” 어느새 루돌프와 산타는 짝을 이루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썰매에 올랐다. 썰매에 오르자 나의 피아노가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는 나에게 마지막 배웅을 해주고 있었다. 썰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까무룩 잠이 들었다. 가는 내내 루돌프의 종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함박눈이 내 얼굴 위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촉촉한 눈과 함께 아득히 멀리 나의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윤이야, 이제 집에 다 왔구나. 내일 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갈게다.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메리 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침, 아빠가 나를 깨웠다. “윤이야, 일어나 봐, 아빠가 무얼 가져왔는지! 숲에서 이걸 발견할 줄이야.” 그날의 아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 눈 앞에는 낡은 피아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쪽 다리에 작은 못이 박힌 피아노, 눈의 나라에서 피아노가 나에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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