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삼촌은 열세 살의 나이에 첫 조문을 갔다고 한다.
아버지를 여읜 나이가 열세 살이었는데 할머니가 너는 가장이라고 조문을 가야 한다고 하셨단다.
억지로 등 떠밀려 조문을 갔다고 한다.
큰삼촌은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고.
무엇보다 힘든 것은 삼촌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었다 한다.
나는 아버지 또래의 분들을 뵙는 게 아빠 생각이 나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나를 보는 그 측은한 눈빛이 더 힘들었다는 말에 마음이 더 아팠다.
그 어린 나이에도 동정의 눈빛은 싫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도 그랬던 것 같아.
현재의 나는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어릴 때 나는 가지지 못한 것은 절대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가엾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아버지 없이 산다는 것이 내가 원치 않는 그 눈빛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빚만 지는 아빠가 너무 싫어 제발 좀 데려가시라 아침마다 기도한 적이 있다.
아빠가 너무 싫었다.
저런 아빠 없는 게 낫다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갚으면 또 빚을 지고 갚으면 다른 사고를 쳤다.
아빠가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즉에 부자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죽어야 빚을 그만 질 거냐고 악다구니를 썼지만 아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아빠를 포기했다.
큰삼촌의 조문 이야기를 듣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일이 생각났다.
나는 여름방학에 풀던 탐구생활을 친구의 집에 두고 왔었다.
개학은 가까워지는데 탐구생활을 가져와야 했다.
가지러 가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언니랑 그 친구 집 포도 서리를 하다가 엄청 혼이 났었거든.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뭐에 씌었는지 언니와 포도 서리를 했고 언니가 그날 엄청 혼난 기억은 난다.
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고 내가 뭘 알아서 갔겠냐며 나는 때리지 않으셨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게 엄청난 잘못이고 도둑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친구 얼굴 보기 미안해서 탐구생활을 가지러 갈 수가 없었다.
그렇고 버티고 버티다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말 그대로 같이 친구네 집에 가 달라는 것이었다.
아빠 손을 잡고 친구 집에 갔고 아빠 입을 빌려 나는 탐구생활을 받아왔다.
현관 앞까지 나온 친구 보기가 너무 미안하고 창피했다.
한 손은 아빠 손을 잡고 한 손은 탐구생활을 든 채로
오는 내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미안하다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 해 가을 즈음, 그 친구가 갑자기 전학을 갔다.
나는 어린 마음에 포도를 도둑질해서 친구가 가버린 줄 알고
오래도록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는 그런 대상이었다.
아빠는 어른이었고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방패가 되어주는.
혼자 조문을 다녀오던 큰삼촌은 얼마나 손이 시렸을까.
아빠 손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좋았는데.
얼마나 서글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