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나는 짧은 기도를 했다.
‘제발, 아빠를 데려가세요.’
새벽에 아빠가 또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벽녘 아빠의 괴성 원인은 두 가지 경우다.
누군가와 다투어 속이 아주 상했거나,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경우이다.
최근에는 대부분 두 번째의 경우다.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는 행동.
어릴 때 아빠가 거의 매일 하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이 침착해야지, 사소한 일에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어.”
지금에서야 알겠다. 당신이 절대로 안 되니까 저렇게 입에 달고 사셨구나.
아빠가 당신 가족의 삶을, 어쩌면 좋은 날일 수도 있는 그 수많은 날들을 그렇게 나쁜 날로 수시로 바꾼 장본인이라는 건 알고 계시는지.
아빠에게 내 삶을 더는 피해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집에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대하고 싶었다.
생물학적 아빠니까 정말 그렇게만 대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빠가 여전히 내 삶으로 들어와 망가뜨리고 있다.
참으면 안 되더라.
참으면 결국 터지고 미친 사람처럼 나도 괴성을 지르더라.
엄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벽에 머리를 여러 차례 박았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이마에 손톱자국을 낸 적이 있다.
바닥에는 내가 뽑아낸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
누가 그러던데 삶이 그렇다고.
이 일이 괜찮아지면 저 일이,
저 일이 괜찮아지면 다시 이 일이.
그런데 아빠 일이 괜찮아지기는 한 것일까.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침체기일 뿐.
나는 오늘 아빠가 죽기를 기도했다.
이 기도는 잊을만하면 나온다.
이 기도, 듣는 분도 힘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