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꽃향기 Oct 31. 2022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단상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단상

나는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했다. 프로그래머로서의 비전이나 꿈도 없이 방황하던 대학시절… 나에게는 전공 적성이 맞지 않았고, 들어갈 때 과수석으로 받았던 전액 장학금 외에 대학4년 내내 한 번도 장학금이란 건 받아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우연히 기술번역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기회가 생겼고, 이것이 졸업 후 진로까지 영향을 주게 되어, 기술 번역 분야에서 20년이 넘는 경력을 쌓아오게 되었다. 번역자, 검수 및 교정자, 편집자, 프로젝트 관리자 등 다양한 직군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아왔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대학교 때 전공은 이 분야에서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컴퓨터에 대한 이해도나 개념이 많이 필요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소스 코드 속에서 변수나 태그, UI(컴퓨터 화면) 메시지나 텍스트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전공이 다른 사람들보다 내게 훨씬 더 유리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다 번역해 주는데, 사람이 하는 번역이 필요한가요?” 

이에 대한 개념 설명을 너무 깊이 들어가면 지루하고 따분해질 것이다.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들려서 하품이 나올 수도 있을 듯하다. 그냥 간단히 예시를 들어보면, 우리가 흔히 쓰는 가방을 생각해 보자. 물건을 넣는 가방이라는 기능은 똑같을 수 있지만, 천이나 종이로 만든 값싼 가방부터, 가죽으로 만든 가방, 악어 가죽으로 만든 수천만원짜리 가방까지 그 가격이 천차만별해도, 사람들은 차 한 대 값에 육박하는 가방까지 그 값어치를 후회없이 지급하며 비싼 명품 가방을 기꺼이 산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가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번역도 마찬가지다. 한 번 쓰면 휘발성으로 사라지는 간단한 인사말부터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신약이나 백신처럼 약품의 개발부터 임상시험, 실제 사용 시까지 모든 순간의 자료들이 영어에서 한글로 번역되고, 그 자료는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십/수백년까지 보관되고 기록된다. 또한, 실제 현장에서 단어 하나, 숫자 하나의 의미가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정확성을 요하는 경우, 단순히 휘발성으로 사용되는 무료 컴퓨터 자동 번역에 모든 것을 맡기겠는가?

사전을 찾아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Do’라는 단어는 어떤 상황이나 분야에서 어떤 전치사나 명사 등과 사용되는가에 따라 수십/수백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컴퓨터가 모든 상황을 문맥이나 실제 사용화면에 맞게 사람이 생각하는 복잡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좋은 컴퓨터도 인간이 느끼는 감각(시각, 미각, 촉각, 후각, 청각)과 감정을 모두 살려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의 업무 환경에서 Microsoft Office 제품군(Word, Excel, PowerPoint 등)이나 한글(HWP) 제품군이 없으면 아예 업무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요즘은 번역 작업시 번역지원도구(Computer Aided Tool)를 사용하여, 좀 더 편리하게 타자기가 아닌 컴퓨터를 사용하여 번역 작업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것은 Google 번역처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자동 번역(Machine Translation)과는 다른 개념이다.

수많은 기업에서의 정규직 경력을 뒤로 하고 나는 프리랜서로 근무한지 벌써 5년이 넘어 10년을 향해 가고 있다. 가장 좋은 건 자유로움이지만, 마감일이 몰릴 때는 몇 일간 밖에 나가 햇볕 한 번 쐬지 못하고, 집에서 컴퓨터 화면 속의 수 천/수 만개의 단어와 눈싸움을 하며,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낸다. 마감 시한과 품질과의 타협할 수 없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어쩔 때는 계속되는 격무로 인해… 이렇게 일하다가 과로사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난 이 일을 좋아한다. 적성에도 맞고, 보람도 느낀다. 가장 유용하게 자료가 사용될 곳에서 누군가에게는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마지막 희망으로 쓰일 수도 있는 제품을 상용화하는 단계에 작은 노력이나마 보탤 수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있다. 또한, 가장 앞선 최신 자료를 한국에 있는 그 누구보다 앞서서 접한다는 즐거움도 있다.  


한국에서의 출판 작가들은 박봉으로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수많은 책 중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은 극히 일부이고, 그것도 인세를 받을 수 있는 인기작가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 이것은 번역 작가들 또한 마찬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워낙에 한국 시장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크지 않고, 저작권 작가에 대한 보상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부디 한국 시장에서 번역 작가이건, 출판 작가이건 자신의 보석 같은 재능을 마음껏 펴고,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만큼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져서 누구라도 자신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출판 생태계가 생성되길 기대해 본다. 누구나 도전해 보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누릴 수 있어야만, 자신만의 피와 땀을 쏟아 부은 창작물들이 자발적으로 늘어나고, 토양에 싹을 틔우지 않을까? 그렇게 자란 창작물들이 수십년을 지나 거목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쉼을 주는 그늘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생명에 꼭 필요한 열매를 맺게 되리라. 

 

 예전에 미국 동부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기회가 되어 대형서점인 반즈앤노블에 들러 이런 저런 책도 보구 진열대를 보았는데, 잡지 코너에 엄청나게 다양한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무도 관심없을 것 같은 정말 다양한 취미 분야의 잡지들이 너무나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었다. 시장의 크기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 중에 내가 주목한 건 아무리 희귀한 분야라도 그 분야의 전문성과 관심도가 존중되고, 또한 그에 대한 상품성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분야를 비싼 돈을 치르지 않더라도 쉽게 접하고 이용할 수 있는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고, 그에 대한 꿈과 비전을 키우고 전문성을 키우며 나아갈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이러한 행복을 한국 사람들도 가깝고 누리고 활용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얼마전 직장생활할 때부터 즐겨 이용했던, 반디앤루니스 서점이 폐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쾌적한 환경에서 다양한 책을 볼 수 있어서 너무나 애용하던 곳인데, 우리나라 오프라인 서점의 위기에 더해 코로나 사태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자주가던 반포에 있던 반디앤루니스 서점 자리에 가보니 가구전시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극장 옆의 가구 전시장이라니, 조금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 곳에서 책을 보며 꿈을 키우던 아이들이 많았을 텐데, 너무나도 좋은 교육의 장이 없어져 버려 못내 아쉬웠다. 아무리 좋은 기업도 수익을 내지 못하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조금 더 일찍 더 애용하고 아껴주는 마음을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전 05화 2021년 여기는 서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